언제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시간이 늦었는데 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요?"
"네. 어디예요?"
"아직 사무실이야. 내일 저녁 비행기로 홍콩 갔다 마카오로 넘어가야 해서. 마지막 서류 검토 중이었어. 그런데 당신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무 일 없어요. 바쁜 거 같은데. 미안해요. 방해해서."
"커피 한잔 하려고 했어."
"끊어요. 조심해서 다녀오고."
"잘 다녀올게."
그와 통화하는 내내 그의 목소리에서 밝고 강한 힘이 느껴졌다. 통화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지만 영랑이 다녀간 후 생각이 많아져서인지 시간이 갈수록 정신이 맑아졌다. 오지 않는 잠을 붙잡기보다는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진행'이라고 쓴 폴더를 열었다.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어 내려갔다. 지금까지 수없이 수정에 수정을 거쳤지만 뒤로 갈수록 전면적 수정이 필요했다. 수정을 멈추고 시계를 봤다. 겨우 30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선배 발인식 때 입었던 검은색 정장을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놨다. 그 옆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영랑으로부터 전해 들은 나를 향한 그의 그리움이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지 생각하니 그가 안쓰러웠다. 오늘은 선배에게 그의 얘기를 전하고 싶었다. 나는 검은색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차고에서 차를 꺼내 비망사를 향해 달렸다.
날은 그 어떤 때보다 화창하고 내 기분도 가벼웠다. 라이트에 매달아 놓은 정민과 찍은 사진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눈은 거의 녹았지만 스치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흰자국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바람이 절 마당을 천천히 스쳐 갔다. 풍경이 맑게 울렸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내 마음에 머물렀다. 돌계단을 오르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산 위로 아침 햇살이 옅게 번져가고 있었다. 이곳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걸음을 옮기자 풍경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도 그 맑은 소리는 공기 속에서 흩어지지 않고 내 곁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선배 앞에 섰다. 그리고 그의 안식을 기원했다. 돌아서려다 잠시 더 서 있었다. 영랑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선배의 시작도 나였고 마지막도 나였다는 것 알아요. 그 선물은 선배의 이름이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곳에 쓸게. 안녕."
납골당을 나와 계단 위에서 앞에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산 위의 햇빛이 조금 더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눈이 남아 있던 자리도 천천히 물기가 마르고 있었다. 산새들의 울음소리 때문인지 그 소리에 섞여 어젯밤 통화 끝에 그의 '잘 다녀올게'라던 말이 들려왔다. 가볍게 내 귓가를 스쳐갔던 말이 아니라 그의 맘을 전하는 소리처럼.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짧은 메시지를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또 지웠다. 나는 그에게 아무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의 곁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되기로 맘먹었다. 차를 돌려 언덕을 내려오자 마을은 여전히 고요했다. 아무 일도 없는 거처럼,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게 아니라 무언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산기슭의 흰 자국은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햇빛이 강해질수록 남아 있던 것들도 제 자리를 찾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비망사로 향할 때보다 훨씬 짧게 느껴졌다.
라디오에서는 아침 뉴스가 흘러나왔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고 멈추자 라디오에서도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시 초록불이 켜졌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우리의 겨울은 끝났고 웃으며 맞게 될 봄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다. 그의 그리움은 결국 길을 잃지 않았다.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그의 그리움이 마침내 나에게 닿았으니. 그의 그리움은 길을 잃지 않고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움이 사라진 자리에 평범한 하루가 놓여 있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어느 날엔가는 지나온 겨울이 떠오를 때가 있을 것이다. 기다림으로 하루를 버텨내야 하던 시간. 그 겨울이 있었기에 우리의 봄은 더 선명하다는 걸 안다. 다시 겨울이 오고 다시 봄도 올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계절이 와도 우리는 서로의 곁에서 머물 것이다. 아침마다 같은 자리에서 커피를 내리고 가끔은 먼저 웃으며 말하겠지.
"오늘은 또 어디에 갈까?"라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