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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 Oct 23. 2022

#92 우산과 우울은 현관 밖에 두고

동굴에 들어가는 것을 멈추다


    어릴 땐 그랬다. 기분이 안 좋거나 우울한 일이 생기면 방문을 꼭 닫고 애착 소파에 몸을 맡겼다. 책을 읽거나 하릴없이 핸드폰을 하거나. 기분이 좋아지려는 노력은 딱히 하지 않았다. 스스로 땅굴을 파고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땅굴 속은 아늑하기도, 슬프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나이의 숫자는 '이제 넌 분명한 어른이야.'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몸만 자란 어른이로 살아가던 어느 날. 삶은 지속되고 때때로 우울해지곤 했지만 직장 생활을 할 때에는 그때그때의 취미생활로 잠깐은 잊고 행복할 수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내어 드디어 시작했을 때. 처음엔 꿈을 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행복했었다. 하지만 "어서 와, 고생길은 처음이지?"라고 말하는 듯한 비포장도로가 바로 시작되었다. 멀미가 나기도 했고 도망치고도 싶었다. 하루는 크게 기뻤다가 하루는 또 크게 낙심했다.



    며칠 전에는 '난 안 될 거야.'라는 기분에 휩싸여 늦은 밤에 겨우 잠에 들었다. 예상 기상 시간은 오전 6시였으나, '헉! 일어나야 돼!'하고 알람 없이 일어난 시각이 새벽 2시 반이었다. 그 후로 한 시간마다 깼으며, 정작 일어났어야 할 오전 6시에는 밤새 잔 듯 안 잔 듯한 피로감에 기절하듯 자버렸다.


    아침에 눈을 뜨니 피로하여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사과를 잘근잘근 씹으며 '오늘은 이렇게 집에 있어야지...'라고 생각하던 찰나, 어린 시절의 내가 생각이 났다.


    '땅굴을 파는 게 무슨 도움이 되지?'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가까운 동네에 사는 친구에게 연락하여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내가 그리로 가겠다고, 얼마나 급하게 나왔으면 지갑도 카드도 현금도 없이 지하철을 탔다.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한참을 나누고, 맛있는 음식에 술까지 한 잔 곁들여 밖에서 한참을 보내고 집에 돌아왔다.



    이제야 우울을 다루는 법을 조금은 게 되었. 비에 젖은 우산만 현관 밖에 펼치고 오는 것이 아니라, 우울감도 현관 밖에 두고 오는 것. 이따금 우울은 또 날 찾아오겠지만, 동굴엔 눈길도 주지 않고 쌩 하고 고개를 돌려 현관문을 열고 나갈 것이다.




- 파랑 -

시인 오은 님과 만화가 재수 님이 내신 '마음의 일'이란 책을 무척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추천드려요.

현재 매일 한 개의 글을 써서 매일 브런치에 업로드하는 '100일 챌린지'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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