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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알 Feb 01. 2024

그래서 비거니즘이란 무엇일까: 비거니즘 개념 탐색하기

에바 하이파 지로의 《비거니즘》과 함께 (by 박성민)


 대학교에 합격한 다음 새내기를 위한 행사들에 참여를 신청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설문 항목이 있었다. “식이 지향”을 고려해 “비건식 희망 여부”를 묻는 설문이었다. 고등학교까지는 급식에 비건식이 별도로 있기는커녕 일상생활에서 비건 식단을 고려하는 경우를 찾기 드물었던지라 그 설문 문항은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비건을 위한 고려가 존재하는구나, 학교에 채식 식당도 있구나, 비건을 주제로 한 동아리도 있구나, 학교에 다니면서 그런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비건에 관한 몰이해도 간간이 목격할 수 있었다. 가령 학내 에브리타임 커뮤니티의 비거니즘 동아리 홍보 글에는 “고기먹고싶어”, “편식하지 마세요”와 같은 조롱이 섞인 반응이 달려 있었다. 채식을 강요하지 말라는 의견, 채식을 그토록 하고 싶다면 제도적인 선택지 마련을 요구하는 대신 스스로 대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의견, 동물은 먹지 않으면서 식물을 먹는 것은 모순이라는 의견 등. 비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예시한 사례 외에도 여러 곳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기사의 내용을 종합하자면, 인터넷에서 비건이란 ‘원하면 조용히 알아서 실천하든지 말든지’ 수준의 문제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다.


 “비건”, “비거니즘”, “채식주의” 등의 표현은 빈번하고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모두 동일한 표현인가? 그래서 비거니즘이란 과연 무엇인가? 단순히 도축된 고기를 섭취하지 않으려는 시도로 비거니즘을 설명할 수 있는가? 중학교 즈음 한때 육식을 자제하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물론 급식에 ‘고기반찬’이 들어가지 않는 날을 찾기 어려운 처지였고, 달걀이나 해산물은 거르지 않고 살코기만 자제했으며, 몇 달 가지 않고 중단하였던 희미한 경험이었다. 전술한 경험 역시 비거니즘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며, 비거니즘 논의에는 예시와 같은 다양하고 폭넓은 사례와 시각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비거니즘이란 이러한 식습관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번 동물해방 스터디에서는 “비거니즘을 식습관 그 이상”으로 이해하려 시도하는 책인 《비거니즘》을 발췌독하며, 비거니즘을 살펴보았다.


 인간 중심주의적 관점에서 인류에게 동물이란 인간의 이익을 위해 활용될 수 있는 존재자였다. 이는 곧 인간―동물(정확히는, 인간이 아닌 동물, 즉 “비인간동물”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의 관계에서 동물을 수단의 지위로 설정한다. 비건 활동주의는 인간과 비인간동물 사이에 그어진 경계를 축소하려 시도하며 인간만이 예외적으로 누리는 특권이 정당하지 않을 수 있음을 지적해 왔다. 인간과 비인간동물의 고통을 비교하는 방식, 비인간동물의 고통을 체화하는 방식, 인간과 비인간동물이 함께하는 다종적 공동체를 구현하는 방식 등으로 인간 예외주의를 기각하려는 움직임이 존재해 왔다. 이러한 접근들은 기존의 인간 중심주의적 인식의 변화를 추동하며 보다 면밀한 비인간동물 구분 방식에 대한 논의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비교 과정에서 지나친 단순화를 유발하거나, 공감을 위시하여 도구적 구조에서 비인간동물에게 행해지는 폭력에 무감해질 수 있다는 한계 역시 지닌다. 상술한 시도들에서 중요한 점은 성급한 보편화에 입각한 접근 대신 비인간동물을 다루어온 제도적·사회적 맥락 안에서 비거니즘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5장)


 책의 논의는 “비건이 되는 것”만에 치우친 단일 쟁점 정치를 넘어서 교차성 비거니즘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여러 학자가 교차성 개념의 틀을 변형하여 인간에 대한 억압과 비인간동물에 대한 억압이 얽혀 있는 다양한 방식을 고찰했다. 가령 줄리아 펠리즈 브루엑은 사회 정의 사안들과 비거니즘이 ‘당연히’ 관련된다는 생각을 배격한다. 대신 다양한 형식의 주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다루어 집합적 대응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비거니즘이 교차하는 억압에 대한 반응이자 동시에 해결책이며, 다른 사회 쟁점들과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역설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더불어 비거니즘과 다른 사회 정의 사안들의 연결이 ‘필연적이지는 않음’을 주장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비거니즘이 곧 인권을 수호하며, 단지 비건이 되기만 한다면 착취에 일조하였던 행위를 완전히 중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입장 사이에서 눈여겨볼 점은 비건 실천이 사회 시스템 차원에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하며, 비거니즘 자체를 섣불리 변화의 동력으로 위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는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비인간동물을 이용하는 행동을 삼간 다양한 맥락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연속성을 발굴하여, 비거니즘이 전 지구의 차원에서 동질적으로 일어나는 지배적인 현상으로 치부하지 않아야 한다는 접근으로도 이어진다. 비거니즘 논의에서 억압을 바라보는 다차원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할 것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6장)


《비거니즘》은 비거니즘이란 무엇인지 단순명료한 정의를 내리며 끝내지 않는다. 그보다는 지금까지 논의되었던 비거니즘에 대한 담론들을 정리하여 종합한 비평서에 가깝다. 스터디에서의 독후 논의는 주로 무지했거나 생각하지 못한 지점들을 알아가고, 생각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개인적으로 평하자면 《비거니즘》 독서를 통해 비거니즘이란 무엇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성장하지는 못했다. 대신 인종차별적인 인식을 기저로 이루어진 동물 도살 비판을 비거니즘으로 동일시할 수 없다는 점, 채식주의의 양식 중 하나로 비거니즘을 국한할 수 없다는 점,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 채식을 주로 하지만 유연하게 육식 역시 할 수 있음)이 비인간동물성 제품을 줄이는 것과 제거하는 것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조장할 수 있다는 점. 그런 지점들에서 지녔던 몽매함을 약간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비거니즘에 대한 꼼꼼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는 사람들, 그리고 비거니즘에 대해 관심이 있는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 글은 2023년 2학기 씨알 스터디팀인 '핵손해' 팀이 활동을 마무리하며 작성한 글입니다.)


[References] 

홍다연, 〈채식뉴스 댓글 75% '부정적'…"풀먹기 강요하지 마"〉, 《비건뉴스》, 2021.02.25., 〈https://www.vegannews.co.kr/mobile/article.html?no=10897

에바 하이파 지로, 《비거니즘》, 호밀밭, 2022, 25면.

상게서, 2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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