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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렘베어 Sep 22. 2022

양의 수를 세어도, 늑대가 잡아먹는다

Brebis comptées, le loup les mange.


양의 수를 세어도, 늑대가 잡아먹는다(Brebis comptées, le loup les mange).


우리가 아무리 철저히 준비하고 주의를 기울여도 사고는 일어난다는 속담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문제가 생기니 두 배로 조심하라는 소리이겠으나, 상황에 따라서는 너무 과도한 대비 또는 허례허식(양을 세는 행위)이 사고를 부른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 속담은 “Lupus non curat numerum ovium.(늑대는 양의 수를 신경 쓰지 않는다)”라는 라틴 격언에서 파생되었다.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BC70-BC19)가 쓴 어느 목가시(Eclogue)의 구절에서 유래한다.

hic tantum Boreae curamus frigora quantum /
aut numerum lupus aut torrentia flumina
늑대가 숫자를 신경 쓰거나 혹은 거센 물줄기가 제방을 신경 쓰는 정도만큼 /
이곳에서 우리는 보레아스(북풍의 신)를 신경 쓴답니다.

다시 말해, 별일 아닌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미를 늑대와 숫자의 관계에 빗대었다.


이 속담의 또 한 가지 논점은 숫자를 세는 행위 자체에 담긴 부정적인 의미이다.

영어권 지역에서는 양 세는 노동요가 있을 정도로 양치기가 양을 세는 일이 보편적인 모양이었으나, 프랑스의 양치기는 양을 칠 때 굳이 양을 세지 않았고 숫자를 세는 일 역시 따분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더군다나 옛날에는 수를 세는 행위가 불길하게 여겨졌던 듯하다. “알이 깨기도 전에 병아리를 세지 말라”, “노름으로 얻은 돈은 세지 말라” 등 셈에 부정적인 미신과 속담들도 꽤나 존재한다. 속담의 기원이 된 로마 시절에도 그랬던 모양인지, 시인 카툴루스(BC84-BC54)의 서정시(오드)에도 비슷한 구절이 등장한다.


da mi basia mille, deinde centum, / 천 번의 키스 그리고 나서 백 번, /
dein mille altera, dein secunda centum, / 또 천 번, 그리고 백 번, /
deinde usque altera mille, deinde centum; / 그리고 또 천 번과 백 번을 해 주오. /
dein, cum milia multa fecerimus, / 우리가 수천 번을 하게 된다면, /
conturbabimus illa, ne sciamus, / 혼란스럽게 몇 번을 했는지 잊기 위해, /
aut ne quis malus invidere possit, / 또한 악마가 우리를 시샘하지 않게 하기 위함일지니, /
cum tantum sciat esse basiorum. / 아무도 얼마나 키스했는지 알지 못하게끔 말이오.
- 카툴루스 5번 시

정확한 숫자를 누설하게 되면 악마가 시기하여 악운이 생긴다고 여긴 것이다.


한편, 이 속담은 1845년에 발간된 프랑스의 캐리커처 작가 그랑빌(Grandville, 1803-1847)의 <100가지 속담(Cent proverbes)>이라는 책에 꽁트 버전으로도 수록되어 있다. 기요(Guillot)라는 양치기가 양을 치며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숫자 세는 법을 배우고 나서부터 늑대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양을 세는 데 집중하다가 양을 잃고 말았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다. 양치기는 나름대로 ‘수량화’라는 근대식(?)수단을 업무에 도입하려 했으나 노련한 늑대는 그 과도기의 허점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랑빌의 삽화, <양을 세어도, 늑대가 잡아먹는다>(1845).


그랑빌은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19세기 전반기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캐리커처 작가였고, 라퐁텐 우화집(1838)의 삽화를 맡기도 했다. 늑대와 양 구도가 옛이야기에 등장하여 사회의 풍자와 해학에 자주 쓰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동물을 잘 그리는 것으로도 이름 났던 그랑빌은 라퐁텐 우화집에서도 늑대와 양을 많이 그렸는데, 그 중 한 그림을 소개해 본다. 이 우화에서는 늑대가 양치기 옷을 입고 양치기인 척한다. 이 이야기에서도 양치기의 이름은 기요(Guillot)이다.


그랑빌, <양치기가 된 늑대>(1838)


이 우화는 그랑빌의 이야기와는 반대로 늑대가 패배하며 끝난다. 양치기 옷을 멋들어지게 차려 입었지만, 목소리만은 속이지 못한 늑대는 동물과 양치기 사람에게 발각되어 잡히는 비극을 맞는다….



참고자료 :

https://fr.m.wikisource.org/wiki/Cent_Proverbes/43 ​

https://www.france-pittoresque.com/spip.php?article7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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