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다가온다. 차분한 열망이 들끓는다. ‘공정과 상식’을 외치며 법치주의의 복권을 약속했던 윤석열 정부로의 심판 의지가 모인다. 대한민국 정치사에 이례적 한 획을 긋고 있는 ‘조국혁신당’의 지지세는 진정한 ‘공정과 상식’의 의미에 대한 재고를 주문한다. 길었던 겨울 끝 만개한 벚꽃 사이로 들려오는 시대정신에 귀 기울여 본다.
대략 2년 전 흩날리는 벚꽃잎 사이로 언론의 치밀한 가스라이팅에 홀린 자들이 있다. 보편적 진리와 정의를 품은 최선의 후보를 외면하고 차선 혹은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음을 한탄하며 표를 내던졌던 비판적 지지자다. 1)
비판적 지지자는 전략적 지지를 운운하며 중립적 관찰자를 자처한다. 지지 대상이 티끌의 음모에 휩싸이는 순간 언제든 등 돌리고 칼 꽂을 준비 되어 있다. 자기편 또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냉철하게 비판할 정도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임을 어필하고 싶은 것이다. 항상 옳은 것처럼 비치면서 도덕적 우위에 서 있다고 느끼고 싶은 것이다.
도덕적 심판자 노릇하는 그들의 태도는 “내가 진짜 사랑하는 여인은 따로 있긴 하지만 그래도 너랑 연애는 해줄게. 나 정도 되니깐 너를 만나주는 거야. 그러니 나는 너를 감시하고 관찰할 거야. 잘못 하기만 해봐!” 식의 저질스러운 비겁함이다. ‘언제든, 쉽게’ 버릴 준비된 그들은 어떤 피해와 상처도 받지 않으려는 쪼잔함을 도덕성으로 오해한 것이다. 지지 대상에게 싸늘하게 등 돌리는 그들은 무죄추정의 원칙조차 잊은 듯하다. 끝내 도덕적 무장을 핑계로 변절하고 우월감에 도취된다.
도덕적 감시자는 자신이 품은 이상과 관념적 상상에 비추어 현실을 바라보고 비판한다. 물론 그들의 논리가 이론적으로는 틀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충분히 현실적이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성과 무감각성을 도덕성으로 오해한 채로 그 누구도 도달하기 어려운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쉽게 요구한다.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사람은 없을뿐더러, 그렇게 도덕이 정치 위로 올라가면 전체주의 비극이 되풀이될 가능성만 높아질 뿐이다. 2)
꾸준히 감소하는 출산율이 보란듯이 증명하듯 한국에서의 삶이 버거운 탓일까? 비판적 지지도 사라져 간다. 지지는 사라지고 가혹한 비판만 횡행하는 ‘비판적 투표’가 등장했다. 청년세대의 만연한 기조는 정치를 통해 바꿀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냉소이다. 3) 물론 먹고 사는 게 바빠서 등 갖가지 이유로 정치에 관심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정치 무관심을 떠벌리는 것은 시민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나 이제는 단순한 취향 표출로 여겨진다.
정신분석학과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무질서와 혼돈이 기본값이다. 질서가 오히려 비정상적 현상이다. 그러니 정치가 피곤하고 혼탁하다는 이유로 냉소주의에 빠진 자들은 검은색 물체를 검은색이라는 이유로 기피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정치는 개인 삶의 관점에서도, 국가의 관점에서도 필수불가결하다. 냉소주의에 기반하여 정치를 외면할수록 정치는 일부 엘리트들의 사무로 축소되고 시민은 NPC처럼 취급될 뿐이다. 결국 정치는 엘리트들의 재롱장치와 그들을 향한 맹목적 지지가 전부가 될 것이다. 4)
시민이란 공동체의 방향과 길을 함께 모아서 의사와 의지를 형성하고 전달하는 적극적 자유인, 참정권을 갖고 의사결정하는 주권자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시민으로서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중립적 관찰과 공감 중 무엇이 우선일까? 발달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공감과 인정이 관찰과 인식에 우선한다. 합리적, 인지적, 비판적 사고에 앞서 타자의 관점과 입장을 취해보는 것이 우선적으로 일어난다.
새로운 시대의 사회변동 주체는 이성적 합리적 능력보다는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완전한 사랑을 꿈꾸면서 실제로는 어떤 사랑도 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이상세계의 가련한 안락의자에서 현실을 향해 한 발짝도 내딛지 않는 것이 미련하다면, 끝에서의 필연적 상처와 과정이 두려워 문밖에서 한 발짝만 내딛는 것은 비겁하다. 5) 무엇이든 처음은 쉽고 재밌을 수 있으나 진정한 의미와 희로애락은 과정 속에 스며들어있다. 지속적인 반복 과정 속 새로움과 놀라움을 발견할 수 있는 섬세한 감수성을 토대로, 공정하고 객관적인 관찰자 입장에서 바라보고 판단하기 이전에 공감과 인정을 흩뿌려 보자.
p.s 한국인으로서 버겁고 혼란스러운 삶의 무게 앞에서 실존적 불안과 위기를 느끼기도 한다. 서서히 침몰하는 난파선에 올라탄 기분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글을 쓰면서도 나 스스로 당당하고 떳떳하지 못했다. "정말 가능할까?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는 생각이 라디오 잡음처럼 어수선하게 맴돈다. 도저히 출구가 안 보인다. 그렇다고 깜깜한 현실과 반복되는 실패가 크게 두렵진 않다. 가장 큰 애석함은 ‘그래, 다시 한번!’을 외칠 힘이 사라져 혼자만의 살길 찾아 난파선을 버리고 탈출하는 상황이다. 비상탈출 버튼을 누르고 싶지 않으나 요새 부쩍 눈앞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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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구용, 문파 새로운 주권자의 이상한 출현 (메디치미디어, 2018), 126pg
2) 같은 책, 128pg, 134pg
3) 같은 책, 127pg
4) 같은 책, 134pg
5) 박구용, “[세상읽기] 차이가 희망이다”,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