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몰비용은 무시하고 ‘지금/여기’에서부터 계산을 다시 해야 하듯이, 과거의 경험이나 사건 등에 대한 죄책감, 분노, 자부심 등은 놓아버리고 ‘지금/여기’에 집중하는 삶이 훨씬 전략적이고 현명하다. 또 그만큼 행복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매몰비용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가?
적어도 나의 어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어머니들은 아무리 맛이 없을지언정 절대로 돈을 지불한 음식을 남겨 둔 채 식당을 나와서 다른 음식을 먹으러 가지는 않을 것이다. 미리 지불한 음식 값이 아까워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과거의 사건에 얽힌 죄책감과 분노, 자부심 등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성적으로는 무시해 버리려 해도 끊임 없이 그 때의 사건이 생각나고 그 생각과 함께 부정적 감정들이 올라 온다. 그러나 과거의 사건에 덫 칠해진 부정적 감정, 즉 죄책감이나 분노, 자부심 등이 올라오는 것 자체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자연스러운 것이니만큼 그런 감정이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은 받아들여도 된다.
그런데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감정을 ‘억제’나 하거나 타인에게 ‘표출’하거나 ‘투사’하는 것이다. 감정을 억제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다. 이성의 작동으로 자연스런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공기가 팽창한 풍선이 너무 뚱뚱하다고 한 쪽을 억지로 누르는 것과 같다. 감정도 에너지라, 억지로 눌려지게 되면 언젠가는 어떤 방식으로던 외부로 터지게 마련이다. 터지지 않으면 내부에서 터질 수 밖에 없다. 외부로 터지건 내부로 터지건 억제되어 있던 에너지, 그것도 부정적 에너지가 터지게 되면 그 결과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풍선효과‘라고 한다.
평소 조용하고 착하던 사람이 갑자기 타인에게 포악하게 돌변한다던 지, 아니면 스스로 화병이 생긴다던 지 더 나아가 자해나 자살을 한다던 지 하는 것이 다 내부에 억제되었던 부정적 감정이 폭발했기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다. 실제로 요즘은 TV뉴스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사건이 있다. 앞서 언급한 도로 위의 보복 운전이라 던지, 변심한 애인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 층간 소음으로 인한 이웃간의 폭행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사건들의 공통점은 평범한 사람들의 ‘분노조절 장애‘ 이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총기 소지가 불가능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치안이 안전한 편에 든다. 그런데도 유독 분노조절장애로 인한 사건,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삶을 비관한 사람들의 자살 등 극단적 범죄나 사건 등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좀비 영화에서처럼 대한민국 사람들이 갑자기 분노조절 장애나 비관주의를 유발하는 바이러스에라도 감염이 된 것인가? 아니면 과거에도 늘 있어온 사건/사고들인데 요즘 갑자기 언론에서 자주 언급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각박해진 환경 탓에 대부분 억제되었던 분노가 사소한 마찰로 폭발하는 경우가 더 빈번해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부정적 감정을 타인에게 표출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앞의 사례에서도 보았듯이 어떤 감정이던 타인에게 전가된 부정적 감정은 결국 언젠가는 부메랑이 되어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타인도 나와 동일한 감정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어서 나로 인해 생긴 부정적 감정을 어떻게든 해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잘 돌아가지 않는 프로젝트 때문에 회사에서 잔뜩 스트레스를 받은 가장이 술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가서 아내와 자식들에게 있는 짜증, 없는 짜증 잔뜩 부린다고 해보자. 그 짜증이라는 것도 일종의 분노인데, 이 부정적 에너지가 어디로 가겠는가? 아내와 자식에게 전가 된 이 에너지는 결국 돌고 돌아 어느 날 자신에게로 돌아 오게 된다. 가장이 나이가 들어 아내와 자식들에게 소외 당하는 것에도 다 이런 이유들이 한 몫을 한다.
설령, 자신에게 돌아 오지 않는다 해도 좋을 것은 없다. 어차피 자신이 내뱉은 부정적 감정이 이 사회의 누군가에게 전가되어 사회 전체의 부정적 수준을 더 높이게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이 또한 앞서 얘기한 분노조절장애 관련 범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어느 날 그대가 무심히 타인에게 내지른 부정적 감정이 돌고 돌아 그런 사회적 범죄로 일어나는 것이다. 당장 내게 피해가 없다고 해서 나와 관계없다고 안심하긴 이르다. 사회가 이렇게 부정적 감정으로 인한 범죄에 시달리게 되면 그런 유형을 범죄를 내가 당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점점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정적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이 있다. 투사는 표출과 다르다. 부정적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에게 투사하여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중세의 마녀사냥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된다. 사회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사건으로 인해 죄책감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사회 전반에 잔뜩 쌓일 때가 있다. 가령, 마을에 홍수나 전염병 같은 큰 자연재해가 닥쳐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을 경우가 그렇다. 자연재해야 천재지변이니 따로 누구를 탓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뚜렷한 대상이 없는 분노 등이 쌓일 수 있다. 사실은 대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들이 홍수에 떠내려가는 동안, 또는 몹쓸 전염병을 앓다가 속절없이 목숨을 잃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무의식 속에 쌓이는 것이다. 비록 무의식 속이라 해도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극에 달하면 견딜 수 없게 된다. 이 때 이러한 부정적 감정을 외부의 특정인에게 투사시키는 것이다.
그 대상이 바로 ‘마녀‘이다. 평소 마을 주변에 외톨이로 살면서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사소한 갈등을 일으켰던 이상한 노파를 마녀로 몰고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가 사실은 노파가 마녀였고, 마녀가 이상한 주술을 부리는 바람에 자연재해 일어났다는 식의 객관적인 근거도 없는 그럴싸한 의혹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 마을의 다른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의혹에 아주 사소한 것들을 엮고 엮어서 의혹을 더욱 부풀린다. 의혹은 그저 의혹일 뿐임에도, ‘이 의혹이 맞다면’ 하는 가정을 근거 삼아 그 위에 또 새로운 의혹들을 더해나가는 비이성적 태도가 사회적 시스템에서 걸러지지 않는다. 결국 그 노파를 빼도 박도 못하는 마녀이자 자연재해의 주범으로 만든다. 그리고 종교재판이라는 아주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절차를 거쳐서 그 노파를 화형 시킴으로써 마을 주민들의 무의식 속에 잔뜩 쌓여 있던 자신들에 대한 죄책감,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해소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투사이다. 투사는 내가 가진 부정적 감정을 없애기 위해 무고한 타인을 희생시키는 가장 좋지 못한 방법인 것이다.
이렇듯 감정을 억제하거나 표출하거나 투사하는 것은 모두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좋은 방법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감정이 자연스럽게 올라오도록 해서 스스로 소진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을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놓아 버림 letting go’라고 했다. 그런데 이 ‘놓아 버림‘이 결코 녹록하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