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경우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과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고자 하는 과도한 욕망,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프로그램화된 미래와 관련된 부정적 감정이다. 이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은 매우 인상적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다'
통상적으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용감하다 혹은 무모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카잔차키스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상실할 것이 없는 사람이고 상실할 것이 없는 사람은 욕망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논리적 귀결을 말이다. 결국 욕망하지 않고, 그래서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잃어 버릴 것도 없으니 세상에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것이 바로 완벽한 자유라는 것이다.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카잔차키스의 자유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자유와 좀 다른 것 같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상태가 자유이고, 그래서 자유로워지려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충분한 돈과 시간이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될수록 빨리 돈을 벌어서 남은 시간이라도 자유롭게 살자' 이런 게 우리가 가진 자유와 관련된 생각이다. 그런데 카잔차키스는 욕망하지 않으면 자유로워 진다고 한다. 우리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뭔가를 더 해야 한다'고 하는데 카잔차키스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뭔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카잔차키스가 말한 것처럼 '욕망을 버리고 상실할 것이 없는 상태'가 진정한 자유라면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는 욕망하지 않아야 한다. 말은 간단한데, 평범한 인간이 욕망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이 인간의 한계인가? 이런 의문이 머리 속에서 빙빙 돌아다닌다.
행복이나 자유와 같은 가치는 인간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다. 누구나 행복, 자유를 위해 오늘의 삶을 고군분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가 행복이나 자유를 추구하는 방식이 틀렸다는 의구심이 마음 속에 생기기 시작했다. 행복이나 자유를 위해 '뭔가를 더 하는 전략' 즉 유위有爲 전략은 보다 '뭔가를 하지 않는 전략‘, 바로 무위無爲전략이 더욱 효과가 있다.
미래 닥쳐 올 일들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또 미래의 상황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지 않아야 현재의 삶이 물처럼 유연하고 편안하게 흘러 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려움과 욕망이라는 부정적 감정을 자연의 섭리에 내맡겨야 한다. 내가 내 삶의 주도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 주도권을 넘겨야 한다. 나의 의도대로 삶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삶이 펼쳐지는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삶의 흐름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것이다.
유위전략에서 무위전략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우리가 사로잡혀 있던 사회적 프로그램들을 버려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반드시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모든 신념에 물음표를 던져 봐야 한다. 뭔가를 열렬하게 하는 것보다 뭔가를 치열하게 하지 않을 때, 우리가 원하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