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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림 Feb 27. 2017

[영화리뷰] 나, 다니엘 블레이크

"저도 돕고 싶어요"

이런 영화 혹은 작품을 만날 때 난 '감격스럽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속으로 되뇐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영화 만들어 줘서 고맙습니다.' 잠시 후 생각한다. '나도 이런 작품 만들고 싶다. 만들고 싶다.' 얼마 전에 라라 랜드가 그랬다. 고마운 존재가 참 많다 싶다.


켄 로치 감독은 현재의 사회 시스템, 즉 자본주의 시스템이 인간을 배제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주인공은 40여 년을 목수 일을 해왔고 현재는 심장병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된 한 남성 노인이다. 이 노인이 남성이라는 점, 생산력이 떨어진 노인이라는 점에 감독의 영리한 의도가 있어 보인다.



마우스(커서)를 화면에 대고 움직여 보세요. (영화 속으로 손을 뻗고 싶었던 장면)

 
다니엘은 태어나서 컴퓨터를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시스템은 실업수당마저 인터넷으로 신청해야만 한다. 마우스를 컴퓨터 모니터에 대고 움직이는 그를 첨단화된 시스템은 배제하는 방식을 취한다.



인터넷으로 신청하셔야 합니다.(지금은 디지털 시대라고요)


과학이 첨단화되고 컴퓨터로 못할 것이란 없는 양 세상은 떠들어대지만 그들의 시스템에 적응되지 못한 '인간'에게 'I'란 없다. 제출하라는 문서의 요구 조건을 충족했는가? 예 or 아니오로만 답하시오. 여전히 컴퓨터는 특정 세력에게만큼은 이진법이다. 컴퓨터는 죄가 없다.



배가 너무 고파서 캔 통조림을 보고는 이성을 잃은 케이티

싱글맘 케이티, 그녀는 새로 이사 온 곳이 낯설어 길을 잃었을 뿐이다. 조금 늦은 그녀에게 역시 시스템은 NO라는 대답을 내뱉고,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그녀는 또 시스템의 도움을 구걸한다. 돈이 없는 그녀는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고는 과일로 연명하다 식료품 배급소에서 캔 통조림을 보고는 정신을 잃은 채 허겁지겁 배를 채운다. 그런 스스로를 책망하고 죄송하다 연발한다. 배고픈 그녀가 맨 처음, 배급소 직원에게 물은 질문은 "혹시 생리대는 없나요?"였다.



급기야 케이티는 '생리대'를 훔치다 식료품 경비에게 들키고 만다.

생산력을 잃은 한 남성 노인과 세 아이의 싱글맘 젊은 여성을 자본주의 시스템 언저리에 배치해 놓은 감독의 의도가 선득하다. 눈물겹다. 자본주의의 발톱은 나이도 성별도 가리지 않는다. 거기에 고작(?) 식료품 가게의 경비가 알량한 권력을 휘둘러 한 여성을 매춘이라는 더 어둡고 습한 시스템의 사각지대로 내모는 모습은 자본주의에 대한 그 어떤 비판보다 매섭고 매정하다.



매춘을 하는, 그녀의 손님을 자청한 다니엘이 그녀의 어깨를 감싼다.


사각지대에서도 가장 불안한 존재는 어린아이들일 것이다. 그녀는 딸의 학교 친구들이, 딸의 구멍 난 신발을 놀린다는 이야기에 경비원에게 전화를 걸기로 결심을 한다. 어둠 속으로 뚜벅, 걸어 들어간다. 눈을 질끈 감았을 테다. 그런 그녀에게 다니엘은 손을 내민다. 어깨를 감싸 안는다. 연대한다.



치매에 걸린 부인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다니엘은 떠나간 그녀가 너무도 그립다.

사람에게 필요한 건 첨단화된 시스템이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따뜻한 손길인 것을. 그뿐인 것을.


끝내 포기하려는 다니엘을 붙잡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난 최선을 다했다고 이 시스템의 요구에 불응하겠다는 다니엘을 마지막까지 붙잡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그녀는 시스템의 말단직에 있다.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그녀의 말에 다니엘은 답한다


40년간 목수 일만을 묵묵히 해온 한 노인의 수고로움과 그가 가진 경험과 연륜과 지혜는 생산력 없음이라는 문장과 일직선에 놓일 수 있는 것인가. 디지털 시대는 직선이다. 곡선이 없다. 언젠가 그녀의 잦은 카톡 대화에-얼굴을 보고 하는 대화나 목소리로 하는 대화가 생략된-넌 왜 자꾸 내게 직선으로 대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물론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다니엘은 케이티의 딸에게 나무로 만든 모빌을 선물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

 소외된 노인이 소외된 싱글맘의 자녀들에게 자신이 직접 손으로 나무를 깎아 만든 모빌을 선물하고 그 모빌을 햇살이 잘 비치는 창가에 달아준다. "마치 바다에 있는 듯할 거야"라며. 손수 깎은 모빌,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음악을 손수 녹음한 카세트테이프, 방의 온기를 높이기 위해 손수 잘라 붙이는 창가 문풍지(?). 그가 가진 지혜, 이웃을 사랑하는 따스한 마음. 노인의 관심과 애정은 차가웠던 아이들의 마음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너무나 선한 질문을 하는 아이. "당신이 저희를 도와주셨죠?" "저도 돕고 싶어요 "

어린아이가 노인에게 묻는다. 어린아이가 노인에게 손을 내민다. 가장 낮은 곳에서 다시 낮은 곳으로. 시스템이 배제한 곳이 가장 따스하다. 연대는 도움이고 시스템은 도움을 모른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원한다. 상담전화의 구린 대기음도 바꿔라!

그는 시스템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라 말한다. 그리고는 시스템 밖으로 걸어가 좀처럼 지워지지 않을 스프레이로 시스템의 벽에 당당히 먹칠을 한다. 비슷한 처지의 노인이 다가와 포옹한다. 함께 기뻐한다. 시스템은 다니엘에게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협박하고 시스템 밖의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시스템 안의 불행이 사실은 공공연했음을 보여준다.




사실상 다니엘의 유언이 되어버린, 승소가 확실해 보였던 항고 법정을 준비하며 다니엘이 적어놓은 말을 죽어버린 다니엘을 대신해 케이티가 읊는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어떤 노인이 꾹꾹 눌러썼음직한 이 메모는 실상 우리 모두의 외침 아니겠는가. 그런데 대체, 왜 이런 문장을 굳이 적어야만 하는가. 죽음으로 이야기해야만 하는가. 대체 왜.


*켄 로치 감독은 시종일관 작품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 흔한 배경음악도 그 어떤 기교도 없이 주인공들의 삶을 조심스레 담아내고만 있다. 마치 이들이 모든 이야기를 해줄 것이요라는 듯이.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감독으로서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는 다니엘을 법정에 세우지 않는다. 그(다니엘)에게, 혹은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다 주지 않는다. 가장 가난한 시간에 가장 가난한 이들의 장례식을 통해 우리의 아픔이 지금도 진행 중임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더욱 좋았다.

그렇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다니엘과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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