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단종은 매화를 '세 사람'으로 불렀을까?

by 박진우

"내가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부터 그대는 나와 함께 했다. 그대는 나의 벗이요. 누이요. 어머니였다. 그 고마웠던 시절을 뒤로하고 나는 길을 떠날 것이다. 먼 훗날 다시 태어나면 그때도 나의 벗이 되어주면 좋겠구나. 나도 기꺼이 그대의 벗이 될 것이다"


단종은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궁녀 매화에게 친구, 가족, 보호자라는 관계의 기능을 나열했다. 그런데, 왜 단종은 매화를 '세 사람'으로 불렀을까?


관계는 하나가 아니라 ‘겹친 역할’이다: 관계의 다중성(multiplexity)


사회연결망 연구에서 Verbrugge는 multiplexity를 한 관계 안에 역할, 교환, 소속이 겹치는 현상으로 정의한다. 친구이면서 이웃이거나, 동료 관계 같은 것들이다. 관계가 단선이 아니라, 여러 기능이 포개진 구조라는 뜻이다(Verbrugge, L. M. (1979). Multiplexity in adult friendships. Social Forces, 57(4), 1286-1309.).


단종의 대사에서 매화는 정확히 그런 존재다.

- 어머니: 보호받고 싶을 때 돌아갈 안전기지

- 벗: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동맹

- 누이: 가족처럼 느껴지는 연대


그런데, 이런 다중성의 관계가 건강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건강한 상태라 할 수 있다. 건강한 관계는 '한 사람에게 관계가 많이 겹쳐 있는 상태'가 아니라 '관계적 기능이 여러 사람에게 분산되어 있는 상태'다.


Collins는 사람들의 일상적 사회적 상호작용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인이 맺는 관계를 '사회적 포트폴리오'로 보고 그 안의 관계 유형 다양성(relational diversity)이 웰빙을 예측하는지 분석했다. 이 다양성은 두 요소로 구성된다(Collins, H. K., Hagerty, S. F., Quoidbach, J., Norton, M. I., & Brooks, A. W. (2022). Relational diversity in social portfolios predicts well-being.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19(43), e2120668119.).

- richness: 관계 유형(가족/친구/연인/동료/지인 등)의 종류가 많음

- evenness: 특정 유형에 쏠리지 않음 (분산)


연구 결과, 관계 포트폴리오가 더 다양할수록 웰빙이 높았다.

한 사람이 '벗+누이+어머니'일 수는 있지만, 그 구조 자체가 건강함을 보장하진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적응력은 관계 기능이 다양한 채널로 분산될 때 커진다.


매화를 향한 단종의 대사는 아름답지만, 동시에 위험한 관계적 구조를 드러낸다.


A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회사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한 사람에게만 털어놓는다.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다. 그 친구는 연애 상담도 해주고, 커리어 조언도 해주고, 가족 문제까지 함께 고민해준다. A에게 그 친구는 동료이자, 벗이자, 형제 같은 존재다.

하지만 둘 사이에 거리가 생기면 A는 친구 하나를 잃은 것이 아니라, 상담 창구·위로 창구·정보 창구를 동시에 잃는다. 스트레스는 줄지 않았는데, 지지 채널이 사라진 것이다.

반대로 B라는 사람이 있다. B는 회사 이야기는 동료에게, 연애 고민은 절친에게, 부모와의 갈등은 형제에게 나눈다. 어느 한 관계가 특별히 깊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특정 관계에서 갈등이 생겨도 다른 채널이 남아 있다. 지지의 구조가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Collins의 이론에 따르면, A는 richness는 높지만, evenness가 낮다. B는 richness, evenness 모두 높다. 한 사람이 내게 '벗+누이+어머니'일 수는 있지만, 그 구조 자체가 건강을 보장하진 않는다. 삶의 적응력은 사랑의 깊이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사랑의 분산 구조에서도 나온다.


또 한편, 사회적 지지는 ‘많이’가 아니라 ‘맞게’가 핵심이다.


사회적 지지가 스트레스의 부정적 영향을 줄이지만 그 효과는 상황과 지지 유형이 맞을 때 더 강해진다. Cutrona & Russell의 Optimal Matching 이론에 따르면 통제 가능한 문제, 즉 해결 가능한 문제는 정보나 도구적 지지가 도움이 되고, 통제 불가능한 문제(상실과 애도)는 정서적 지지가 더 도움이 된다(Cutrona, C. E., Shaffer, P. A., Wesner, K. A., & Gardner, K. A. (2007). Optimally matching support and perceived spousal sensitivity. Journal of family psychology, 21(4), 754.). 그런데, 이 매칭을 한 사람으로부터 모두 얻기가 어렵다. 그래서 관계가 다양할수록, 내가 처한 문제에 딱 맞는 지지를 제공할 사람을 만날 확률이 올라간다. 따라서 관계는 다양할수록 건강하다. 관계가 다양해야 내 삶의 사건이 바뀌어도 적합한 지지의 채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종의 경우, 우리와 같은 환경이 아니다.


유배지에서는 관계적 선택지가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제한된 네트워크에서 강해지는 것은 가까운 관계의 보호기능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convoy model이라 부른다. Convoy model은 삶의 중요한 사건(상실, 전환, 위기)을 겪을 때, 개인을 둘러싼 정서적 친밀도가 높은 관계가 보호 기능을 한다고 본다. 즉, 평상시에는 다양한 관계가 좋더라도, 위기나 전환기에는 ‘가깝고 신뢰 가능한 소수’가 핵심 버퍼가 된다. 관계가 제한된 상황에서는 지지원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이때 최적화 전략은 한 사람에게서 적합한 지지를 더 정확히 뽑아내는 것이 된다. 즉, 유배처럼 바깥 연결이 끊긴 상태에서는 매화와 같이 가족적 책임과 보살핌(어머니), 동등한 연대(벗), 위로(누이)를 동시에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이 보다 적합하다.


단종-매화의 관계는 전통적인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건강한 구조는 아니다. 기능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고, 단일 실패점(single point of failure)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가 붕괴되면 전체가 무너질 위험이 크다. 그러나 유배라는 특수한 조건을 고려하면, 그 다중성은 오히려 적응적일 수 있다. 관계망이 제한된 상황에서는 분산이 불가능하고 이럴 때 선택은 남은 관계를 확장하는 방법 밖에 없다. 이때는 한 사람을 통해 여러 역할을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심리적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래서 나는 단종의 대사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대는 나의 벗이요. 누이요. 어머니였다.”

이 대사는 관계가 축소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구조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보통의 삶에서는 관계를 분산시키는 편이 적응적이지만, 극단적 상황에서는 관계를 넓히는 대신 한 사람을 통해 사회적 기능을 확장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


하와이 카우아이섬에서 진행된 Werner와 Smith의 회복탄력성 연구가 바로 그렇다. 이 연구는 가난과 가족 문제, 사회적 위험에 노출된 아이들 중 일부가 어떻게 건강하게 성장했는지를 수십 년간 추적했다. 흥미롭게도 그 아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된 보호 요인은 적어도 한 명의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이었다.

최악의 환경을 버텨낸 카우아이섬의 아이들에게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다. 네트워크의 다양성이 아니라, 믿고 기댈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들을 지탱했다. 회복탄력성은 언제나 관계의 수에서 나오지 않는다. 관계의 밀도와 신뢰에서 나온다.


단종의 고백은 극단적으로 고독한 세계에서 한 사람을 통해 사회적 기능을 확장한 선택이었다. 심리학적으로 현명했지만, 인간적으로는 몹시 가슴 아픈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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