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과 날씨의 상관관계
승무원이 된 이후로 여름과 겨울이 싫다.
잦은 비와 태풍이 많은 여름, 눈이 오늘 겨울은 비행 생활을 하는 승무원들에게 있어서 반가운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 여름에도 비가 참 많이 왔다. 그럴 때면 '오늘 같은 날씨에 비행하는 승무원들은 힘들겠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난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공항 전광판에 '결항', '지연', '수속 중단'이라는 빨간색 문구가 떠있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날 출근을 앞둔 승무원들은 수시로 날씨를 체크하고 공항 상황을 살핀다. 날씨 때문에 비행기가 결항 또는 지연이 되는 경우에 공항은 아수라장이 된다. 공항 발권 카운터에서 수백수천 명의 승객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티켓을 구하는 모습부터 공항 바닥에서 노숙을 하는 모습까지 뉴스를 통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때 승객뿐만 아니라 우리 승무원들도 운항이 재개되길 바라는 마음은 같다.
사무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나서 몇 년간 날씨 IRRE상황(Irregular 비정상 상황)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 비행을 할 때면 동료 승무원들이 걱정을 하곤 하는데, 그럴 때면 그들 앞에서 이런 호언장담을 하곤 했다.
"날씨 요정이 있으니까 오늘 비행은 걱정하지 마!."
국내선 비행을 하는 날.
비행기에 타기 전 승무원들은 오늘의 날씨, 기류를 비롯한 안전과 관련하여 전반적인 사항들을 기장으로부터 전달받는 합동 브리핑을 한다. 이날 기장님은 김포 공항 날씨가 좋지 않지만 비행기가 내리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을 거라는 말을 하셨다. '날씨가 좋지 않다'라는 말은 비행하면서 흔한 일이기에 승무원들 모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비행을 해나갔다.
제주에서 출발하여 김포에 도착하는 편이었다. 순조롭게 제주에서 이륙을 하였고 모든 기내 서비스를 마친 상태였다. 나와 후배는 여유롭게 점프싯(Jump Seat 승무원 전용 좌석)에 앉아 착륙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갑자기 띵동~하는 인터폰(Interphone 객실과 조종실 또는 객실과 객실 간 의사소통할 수 있는 기내 설비) 알림이 울렸다. 기장님이었다.
"사무장님, 잠시 칵핏(Cockpit 조종실)으로 들어오시죠."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기장이 사무장을 조종실로 들어오라고 하는 경우는 없다. 특히 착륙을 앞두고서는 더더욱 말이다. 기장님이 나에게 뭔가 급하게 전달할 사항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급히 조종실로 들어갔다.
"사무장님,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요. 김포 공항 쪽 날씨가 갑자기 안 좋아져서.. 여기 계기판 보시면 김포로 가는 비행기들이 착륙하지 못하고 공중 선회하고 있어요."
알아볼 수 없는 조종실 계기판이었지만 확실한 건 어떤 지점을 중심으로 콩같이 생긴 점들이 주변으로 모여 있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기장님!! 안돼요.. 저희 꼭 김포로 내려야 됩니다.."라고 다급하게 말을 했다.
"일단 저희도 홀딩(Holdong 공항으로 착륙을 잠시 중단하고 공중에서 선회하는 것)하면서 다이버트(Divert 회항)를 할지 상황을 지켜봐야 될 것 같아요."
조종실에서 나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승무원들에게 공유했다. 갑작스러운 회항 소식에 승무원들은 의아했고 '설마'라는 심정으로 회황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객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기장님으로부터 다시 인터폰이 왔다.
사무장님, 저희 인천 공항으로 회황 결정 났습니다... 준비하시죠.
결코 일어나지 않길 바랐던 일이 벌어졌지만 승무원들과 승객에게 티를 낼 수 없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철렁한 가슴을 진정시키니 이내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는 승객들에게 목적지 공항이 바뀐다는 회항의 기내 방송을 덤덤한 말투로 하였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승객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승무원을 부르는 호출 버튼 알람이 여기저기서 울린다.
개인 일정으로 반드시 김포 공항에 가야 하는 승객, 비행기를 많이 탔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말하는 승객, 날씨가 좋지 않았으면 애초에 태우질 말았어야 하지 않냐고 말하는 승객과 같이 항의하는 승객들로 넘쳐났다. 승무원들은 최선을 다해 승객들에게 상황 설명을 하였지만 그들을 이해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10시간 같은 10분의 시간이 지났고 그 사이에 비행기는 인천 공항에 착륙했다.
목적지는 달라졌지만 공항에 도착했으니 내려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최종 목적지인 김포 공항의 날씨가 좋아질 가능성이 있다면 승객들은 비행기에서 내리지 못하고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대기를 해야 한다. 참고로 비행기는 보안 문제로 일반 대중교통처럼 마음대로 타고 내리는 게 쉽지 않다.
공항에 도착했으니 내려도 되지 않느냐, 차라리 여기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겠다, 도대체 왜 못 내리게 하느냐 등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컴플레인이 쏟아졌다.
제주에서 출발하기 전까지 아무 문제가 없었던 날씨였는데 착륙 직전 날씨가 말썽을 부리니 참 환장할 노릇이었다.
나를 비롯한 승무원들은 기내 복도에서 거의 기어다니다시피 무릎을 꿇고 다니며 '죄송합니다, 저희도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날씨가 좋아지면 다시 김포 공항으로 갈 예정입니다. 부디 양해해 주세요.'를 연거푸 말하고 다녔다. 잘못은 날씨가 했지만 승객들 입장에서는 이마저도 항공사와 승무원의 잘못인 것이다. 물론 감당해야 될 일 중 하나이지만 이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얼마 후 김포 공항 날씨가 좋아져 다시 출발할 수 있다는 기장님의 인터폰을 받았고 마음속으로 환호했다.
"여러분, 드디어 저희 김포 공항으로 갈 수 있답니다!!"라고 승객을 향해 외치고 싶었지만 차분하게 기내 방송으로 내용을 전달했다. 그제야 아수라장이었던 기내 상황도 정리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김포 공항에 도착을 했다. 날씨가 좋지 않다고 했던 김포 공항은 야속하게도 맑은 하늘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탈하기 짝이 없다.
비행기가 주기장에 도착하였고 승객들이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예상 시간보다 많이 늦어진 도착 시간 때문에 승객들은 화가 풀리지 않았고 승무원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중 나이가 지긋하신 한 할아버지가 "고생했어요. 승무원이 무슨 잘못이야. 날씨 때문에.."라는 말을 하시고 내리셨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동이었다. 그리고 감사했다.
비행기에서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 혼이 나갈 정도로 정신이 없다. 특히 감정 상하는 말을 듣곤 하면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들 중 단 1명이라도 승무원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분이 있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상처받았던 마음이 싹 가라앉는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준 동료 승무원들과 기장님.
비행이 끝난 뒤 모두 넋이 나갔다. 그때 막내 승무원과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PS. 혹여 내가 탈 비행기가 날씨로 인해 결항이나, 지연, 회항을 하는 경우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니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 주세요. 기장과 승무원들은 누구보다도 승객 여러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