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낫프로
저는 텍스트로 브랜드 아이덴티티 만드는 일을 해요. 브랜드 인큐베이터이기도 하고, 브랜드 심폐소생사이기도 합니다. 브랜드 컨셉을 만들고, 지향점을 설정하고, 이름을 짓고, 스토리를 써요. 아무것도 없던 브랜드에 실체를 부여하고 세상에 존재하게 만들어주죠. 또 사람들이 지루하게 느끼는 브랜드를 리뉴얼해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주기도 한답니다.
누군가 “무슨 일 하세요?” 물어보면 그동안은 ‘브랜딩’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이 단어가 되게 모호하더라고요. 브랜드를 만든다는 건지, 운영한다는 건지 부연설명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요즘은 텍스트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일을 한다고 해요. 짧고 임팩트 있게 설명하고 싶으면 이름을 짓는다고 합니다. (제일 재밌어 보여서요.) 그래서 가끔 “작명가세요?” 하는 질문을 듣습니다. 이름 짓는 직업인이 작명가는 맞는데 작명가는 철학관이 철컥 붙어 연상되니까 그럴 때마다 당황했어요. “어… 그게 맞긴 맞는데요, 또 그건 아니에요” 하고.
내 일의 정체성과 핵심을 설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말하는 시간은 1분도 되지 않을 텐데 다른 사람에게 1분보다 큰 인상을 남길 수 있어요. 또 첫인상과 다른 대답이라면 그 사람이 달라 보이기도 하고요. 이런 일을 하니까 이런 성격, 저런 일을 하니까 저런 시간을 살았을까 하는 선입견을 갖게도 하죠. 그래서 늘 멋지게 내가 하는 일을 말하려고 했어요. 좋아 보이려 조금은 포장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5년 정도 이야기해보니까 일을 멋지게 설명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더라고요. ‘일 = 나’는 아니잖아요.
일을 설명하면 “재밌는 일을 하시네요!”라는 말을 꽤 들었어요. 그 후 제가 덧붙였던 말은 “일은 일입니다. 후훗.”이었죠. 재미있어도 머리 터지기 부지기수이고, 기분 상할 때도 있고, 놀랍고 짜릿한 상황에 헛웃음이 날 때도 있었어요. 그래도 재밌는 일처럼 보였던, 재밌기도 했던 제 일을 5년 동안 참 좋아했어요. 지금도 좋아 하지만 이제는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요. 작명가,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텍스트로 만드는 일의 유효 기한은 끝난 것 같거든요.
브랜드를 만드는 건 이전보다 쉬워졌어요. 그리고 요즘은 임팩트 있는 처음보다 브랜드를 키워가는 과정과 소통이 더 중요한 시대로 변했죠. 일관성도 있어야 하지만 다채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플렉서빌리티도 필요해졌어요. 브랜드를 시작하는 공식도 많이 파괴됐고요. 또 저는 브랜드의 시작만 함께 했기 때문에 꾸준히 하나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어요. 브랜드를 만들면서 가졌던 꿈이 100년 가는 브랜드 만들기였는데, 100년 가는 브랜드는 직접 운영해봐야 흥망성쇠를 알 수 있는 거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야 할 일은 한아름 아이덴티티를 텍스트로 만들기입니다.
100년 가는 브랜드는 만들 수 없어도 한아름은 100년 정도 갈 게 확실하니 준비해야죠. 한 가지 일만 하기에 남은 시간이 너무 길잖아요. 그리고 저는 하나만 파는 전문가 타입은 아닌 것 같아요.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이것 조금, 저것 조금 파는 게 더 재밌어요. 언젠가 조금씩 판 웅덩이들이 하나로 모여 커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깊게 못 간다면 넓고 얕게라도! 스페셜리스트보다 제너럴리스트로 포지션을 공고히 해볼까 해요. 가만히 있고 싶어도 시대가 자꾸 가만히 있지 못하게 흔드니 흐름을 타야겠어요. 이제 작명가였지만 지금은 아닙니다,라고 떠들고 다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