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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Sep 16. 2024

불편한 청결



아침에 코 세척기를 들었다. 시드니에서 17일 일정을 마치고 멜번으로 돌아왔다. 출장 중반, 감기 기운이 스며들었다. 몸은 회복됐지만, 여전히 콧물과 가래가 목을 막았다. 코를 아무리 풀어도 가시지 않는 답답함. 코 세척기가 필요했다. 한쪽 콧구멍으로 세척액을 밀어 넣었다. 몇 초 지나자, 쌓였던 농과 피딱지가 쏟아져 나왔다. 코를 푸는 것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청량감이 머리까지 스며들었다. 왜 이걸 매일 안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염증의 농을 씻어내고 나니, 내가 조금 더 사람 같아 보였다.



시드니에서는 몸만 힘든 게 아니었다. 조카와 장모님을 만나러 갔지만, 감기 증상은 나를 방해했다. 신생아 조카를 안는 게 부담스러웠다. 처남 부부가 내 상태를 불편해할까 신경이 쓰였다. 기침과 콧물 때문에 가족과의 시간이 어그러질까 걱정했다. 그만큼 불안이 컸다. 그래서 세척 후의 쾌적함은 더 컸다. 걱정이 컸던 만큼, 세척 후엔 가뿐해졌다. 농과 불결함이 사라지자, 몸과 마음이 동시에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코 세척기는 내게 필요한 도구 중 하나다. 나는 치석 제거기와 발 각질 제거기도 쓴다. 치석 제거기는 치아 틈새를 파고든다. 발 각질 제거기는 발바닥을 긁어낸다. 이런 도구들을 쓰면 청결함이 느껴진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뭔가를 관리한다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비슷한 도구를 쓰는 사람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들도 나처럼 깔끔함에 신경을 쓰는구나 싶다. 두피 스케일러, 귀 세정기, 안구 세척기 같은 도구들도 보인다. 쓰는 사람에 '청결한사람' 태그를 붙인다. 제품을 보면, 현대 사회가 얼마나 청결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다.



철학자 한병철은 매끄러운 것을 현대 사회의 미의 기준이라고 했다. 핸드폰 필터가 그걸 더 부추긴다. 필터는 결점 없는 얼굴을 만들어 준다. 전염병은 이런 기준을 더 강화한다. 이제 위생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책임이 됐다. 그러니 사람들은 이 기준을 따른다. 저항하지 않고.



나는 이 기준이 개인의 선택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매끄러운 외모, 높은 위생 기준을 유지하려면 돈과 시간이 든다. 우리는 명품을 선망하고 비싼 차와 집을 꿈꾼다. 마찬가지로, 위생도 멋의 상징처럼 되었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이 성공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인기와 평판을 위해 청결을 좇는다.



나는 이 사회의 기준을 어느 정도 따른다. 그 기준이 편하니까. 가끔은 헷갈린다. 이게 내가 원하는 건지, 아니면 사회가 원하는 건지. 라캉은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했다. 나도 그렇다.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물론 현 기준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뭐, 이렇게 사는 거지' 싶다. 하지만 그게 씁쓸하다. 내가 더 나아가고 싶지 않은 건지, 아니면 더 나아가는 법을 모르는 건지. 이런 고민을 하면서도, 어차피 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겠지만, 뭘 어쩌겠나. 바꾸는 법은 잊었으니까. 그걸로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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