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은 말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힙합의 전설 노토리어스 B.I.G는 말했다. 돈이 많아질수록 문제도 많아진다. 두 문장을 함께 떠올리면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한다. 돈과 걱정은 평생을 함께하는 동반자다. 돈을 떠올리는 순간, 걱정은 옵션이 아니라 기본 사양으로 따라붙는다.
세월이 흐르며 내게 늘어난 건 나이와 경험, 그리고 약간의 돈이다. 통계적으로 나이를 먹을수록 부는 커진다. 돈은 스스로 몸집을 불리는 성질이 있고, 덩치가 커질수록 더 좋은 기회를 끌어온다.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의 위치가 바뀌고, 정보의 질이 달라지면서 기회의 구조도 바뀐다. 20대보다 30대에, 30대보다 40대에 더 많은 돈을 갖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하지만 돈이 많아질수록 걱정도 함께 커진다. 자산이 사방으로 퍼질수록 관리해야 할 영역은 넓어지고, 작은 흔들림 하나가 연쇄적으로 번질 수 있다. 결국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며 사는 존재가 아니라, 더 큰 문제로 이동하는 존재다. 부족할 때는 생존을 걱정하고, 늘어나면 유지와 추락을 걱정한다.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더 큰 단위로 이동할 뿐이다.
인생은 오르내림의 연속이다. 잘 나갈 때일수록 언제 내려갈지를 고민하게 된다. 정점에 있을수록 발밑을 더 자주 내려다보게 된다. 진짜 최악은 추락 그 자체가 아니라, 추락이 올 수도 있다는 감각이다. 낙폭을 가늠하는 동안 불안은 현실보다 더 크게 부풀어 오른다.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실제로 무너진 순간보다, 무너질 수 있다고 느끼는 구간이 더 길고 고통스럽다. 상상은 끝이 없고, 그 안에는 언제나 최악의 시나리오가 포함된다. 공포는 현실보다 먼저 온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도 그 구간에 가깝다. 주 소득원이 흔들리고 있고, 신규 사업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숫자로 보면 아직 버틸 수 있지만, 감각은 이미 흔들린다. 시스템이 멈추면 나는 다시 노동을 시간 단위로 쪼개 팔아야 한다. 자본이 일하던 구조가 무너지면, 다시 내가 일해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쇼핑센터에 입점한 매장은 사실상 실패에 가깝다. 공실이 많은 공간은 사람을 끌어들이지 못한다. 매출은 나오지 않는데, 월세는 그대로 돌아온다. 이 상태가 길어지면 단순한 손실이 아니라, 다른 사업까지 영향을 미친다. 돈의 문제는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있다. 아직은 체력이 남아 있고, 다른 사업이 버티고 있다. 시행착오는 비용이 아니라 데이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여러 번 반복해본 구조다.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돈은 걱정을 없애는 수단이 아니라, 걱정을 관리해야 하는 상태를 만든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돈의 크기가 아니라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구조와 태도다. 걱정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것이다.
결국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내가 해석한 가능성이다.
이벤트는 성공적이었다. 결과는 훌륭했고, 반응도 좋았다. 사진도 많이 건졌고 영상도 쓸 만하다. 집기류도 좀 샀다. 다음에 또 쓸 수 있다. 반복하면 수익 모델이 개선될 것이다. 이런 말은 보통 글의 앞부분에 나온다. 그리고 대부분 쓸모없다.
진짜 사건은 집에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터졌다.
메모리 카드를 꽂고 사진을 옮기던 중, 동료가 찍어준 내 모습이 화면에 떴다. 행사 후반부, 카메라를 넘겨준 대가였다. 화면 속에는 사람이 아니라 낫이 하나 서 있었다. 직선이 아니라, 앞으로 휘어진 곡선. 폰트로 치면 세리프다.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간, 괜히 멋부린 형태. 물론 전혀 멋있지 않다. 몸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거북목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보는 순간, 불쾌감이 선명해진다. 인간은 타인의 단점보다 자신의 단점을 더 싫어한다. 도망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히 방향키를 눌러 사진을 넘겼다. 도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소극적이고, 인정이라고 부르기에는 비겁한 행동이었다.
이상한 점은 따로 있다. 나는 내 목을 매일 쓰고 있는데, 그 형태는 사진으로 처음 본다. 거울은 정면만 보여주고, 몸은 감각만 전달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직접 보는 일이 거의 없다. 대부분 타인의 시선이나 기록된 이미지를 통해서만 자신을 확인한다.
그래서 사진은 낯설다.
낯설다는 건, 사실 처음 본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나중에 알게 된다. 이미 만들어진 결과를, 뒤늦게 확인하는 식으로. 나는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받아보는’ 쪽에 가깝다.
이쯤 되면 사실이 아니라 서사의 문제다. 우리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다. 사실을 이해 가능한 형태로 다시 만든다. 정리하고, 다듬고, 약간 과장해서 이야기로 바꾼다. 인간은 사실을 인식하는 존재라기보다, 서사를 만들어내는 존재에 가깝다.
그래서 같은 사진을 보고도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충격을 받고, 누군가는 글을 쓴다. 나는 세 번째다.
문장이 현실을 밀어낸다. 사실보다 이야기가 먼저 자리를 잡는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낫이었는데, 다시 떠올리니 덜 휘어진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원래 저 정도였나. 헷갈린다. 이쯤 되면 목이 아니라 기억이 문제다. 아니, 기억이 아니라 서사다.
그래서 인정하기로 했다. 이 글은 지금 실시간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나에 의해, 나를 위해. 그리고 약간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너를 위해.
지금 나는 턱을 당기고 있다. 허리를 펴고 있다. 모니터를 약간 올려다본다. 잠깐이지만 인간의 형태를 회복했다.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건 보통 오래 가지 않는다.
지금 이 문장을 읽는 동안만큼은 너도 목을 덜 빼고 있을 것이다. 의식하지 않았더라도, 약간은. 우리는 서로를 교정하고 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아주 쓸데없는 이유로. 그런데 이런 쓸데없는 이유들이 가끔은 꽤 쓸모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직접 보지 못한다. 대신, 기록과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 위에 이야기를 덧씌운다.
결국 우리는, 사실이 아니라 해석된 자신을 보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