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호러에 에로스를 첨가한 긴장감 넘치는 영화.
※ 스포일러 있음.
※ 아래 이미지들의 출처는 왓챠피디아.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진작부터 또렷이 알고 있던 아내의 처절한 고뇌와, 본인이 일으킨 끔찍한 상황을 조금도 파악하지 못하는 남편의 혹독한 고생이 담긴 피비린내 나는 고전을 재해석한 로버트 에거스의 <노스페라투>는 관객에게 상당한 몰입감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아래는 필자가 소개하는 이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로, 여러분의 기억 또는 관심을 자극하고자 이를 적은 것임을 밝혀둔다.
으스스하고도 불길한 오프닝이 끝나고 분위기가 밝게 바뀌며, 신혼부부인 아내 엘렌과 남편 토마스가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모습이 등장한다. 서사의 흥미로운 전개를 위한 당연한 흐름대로, 책임감 있는 가장이자 신참 공인중개사인 토마스는 자신의 직장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엘렌의 만류를 무릅쓰고 먼 길을 떠난다. 그리고 저주가 내뿜는 냉기로 가득한 오래된 성에 겨우 도착한 그는, 순진하고도 용감하면서 어리석게도, 그 안으로 홀린 듯 입장한다. 스스로를 사지에 빠뜨리는 자의 뒷모습이 얼마나 딱해 보이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영화 속 순간.
성의 주인인 올록 백작은 그 누가 봐도 끔찍한 재앙을 불러일으킬 만한 섬뜩한 존재이다. 하지만 막막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아내마저도 백작에게 넘기는 토마스의 경악스러운 무지가 어쩐지 더 소름 끼치는 건 왜일까. 그 시각, 세상의 파멸에 이바지하고 있는 남편을 기다리며 서서히 제정신을 잃어가던 아내 엘렌은 기괴하고도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이며, 잔혹한 누군가의 방문을 두려움 속에서 예고한다. 그리고 올록 백작이라는 이명을 가진 흡혈귀 노스페라투는 그녀의 음산한 예언을 실현하러, 역병과 함께 엘렌의 마을에 상륙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은 비명과 울음소리가 가득한 곳으로 바뀌었고, 이 참극을 막기 위해 간신히 돌아온 남편 토마스는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괴짜 프란츠 교수와 함께 노스페라투를 막을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물론 모두가 예상한 대로 해결의 열쇠는 아내 엘렌이 쥐고 있었고, 이를 알고 있던 프란츠 교수는 그녀에게 이 사실을 남몰래 전해준다. 자신의 슬프고도 거룩한 운명을 받아들인 엘렌은 흉측하고도 늙은 변태 흡혈귀와 사랑을 나누고, 노스페라투의 약점인 아침까지 그의 육체를 붙잡아 마침내 비극을 멈추는 데 성공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 역시 숨을 거두고 만다.
참고로, 이 작품은 약 100년 전에 F. W. 무르나우가 만든 동명의 무성 흑백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원작 역시 감상했기에 둘을 비교하자면, 20세기의 그것 역시 꽤 준수하지만, 그럼에도 21세기의 손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 들어주고 싶다. 고딕 호러에 에로스를 첨가한 이 긴장감 넘치는 서사에는 출중한 연출이 필수적인데, 이 작품 속에서 미지와 공포, 관능과 불안, 붕괴와 절망을 다루는 에거스의 실력이 상당한 수준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불쌍한 남편은 자신의 남은 삶을 대체 어떻게 견딜 것인가. 영화는 그를 버려둔 채로 막을 내리기에, 남편 토마스의 미래는 상상의 영역에 놓인다. 나는 그저, 그가 자신을 너무 원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25. 0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