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벳들의 집합을 통해, 원소가 지닌 특성을 예측할 수 있다.
가끔은 이부자리에 누워 쓸데없는 상상에 잠기곤 한다. 누군가 내게 "당신이 여태껏 내려온 여러 선택들 중 으뜸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뭐라 말해야 할까 같은. 그에 따라 부질없는 고민에 빠지게 되고, 간신히 "화학을 전공한 것입니다."라고 답해야겠다는 결론을 얻고서야 겨우 잠에 빠져든다.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 떠올려봐도, 학부 과정 중 전공과목들을 수강한 시간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때였다 여겨진다. 근데, 그게 대체 뭐라고 그렇게나 보람 있고도 재미있었을까.
나와 같은 전공자들에게 학문으로의 화학을 대표하는 분야를 두 개만 고르라 시킨다면, 아마도 대다수는 유기화학과 물리화학이라 말할 것이다. 이들을 아주 간단히 설명하면, 유기화학은 여러 원리들을 바탕으로 수많은 반응을 탐구하는 학문이고 물리화학은 그러한 원리들을 복잡한 이론들을 통해 이끌어내는 학문이다. 각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굉장한데, 유기(Organic) 화학은 정성적 관점에서 아름답고 물리(Physical) 화학은 정량적 측면에서 멋지다. 이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면 한도 끝도 없으므로 이쯤으로만 간략히 표현한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수업은 이 둘이 아닌 무기(Inorganic) 화학이다. 그 어떠한 것들에서도 경험할 수 없던 상당한 수준의 지적 쾌감을 내게 안겨주었던 과목.
언급한 무기화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주기율표(Periodic table) 내 원소들에 대한 암기가 반드시 요구되었고, 정확히 원자번호 30번까지의 순서를 숙지했어야 했다. 주기율표는 러시아의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원소들의 성질과 규칙을 정리하려 고안한 것으로, 화학사의 가장 탁월한 성취 중 하나라 단언한다. 가로의 주기(Period)와 세로의 족(Group)으로 구성된 이 알파벳들의 집합을 통해, 우리는 어떤 원소가 지닌 특성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무언가를 직접 실험하지 않고도 그에 대해 비슷하게나마 알 수 있다는 건, 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목이 터져라 울부짖으며 알려주고 싶을 만큼이나 굉장한 일이다.
아쉽게도 책에 담긴 원소 하나하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나의 능력이 부족하여, 원자번호 1번 수소와 원자번호 3번 리튬을 다룬 챕터들에 대해서만 이곳에 적는다. 이 글이 이를 보는 모든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소망한다.
챕터 1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수소결합(Hydrogen bond)이다. 구체적으로, 우주에서 가장 흔한 원소인 수소와 생체분자를 대표하는 단백질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인체를 이루는 단백질은 20개의 서로 다른 아미노산들이 수십 개 이상 공유결합(Covalent bond)하여 만들어지는데, 단백질을 설명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갖는 구조이다. 이어 말하면 어떤 단백질이 우리의 몸에서 특정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고유적 형태 때문이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수소결합이다. 이 바로 수소결합이다. 이 수소결합은 전기음성도(Electronegativity)가 높은 산소와 질소가 전자를 잃기 쉬운 수소와 가까이 있을 때 존재하는데,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을 상징하는 원소들이 그 산소와 질소이다. 서로 다른 두 원자를 공유결합처럼 완전히 이어 줄만큼 강하지는 않으나 그 둘을 붙일 수 있을 만큼은 센 절묘한 수소결합의 힘 덕분에, 생명체 안에서 수많은 현상들이 발생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랍기 그지없다.
덧붙이자면, 전자 하나와 양성자 하나로 이루어진 수소원자는 물리학적으로 정확한 해(Solution)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모형(Model)이다. 헬륨 이상의 원자들에 대하여 이를 획득하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함이 증명되었고, 계산을 통해 구해지는 셀 수 없이 많은 계(System)들의 물리화학적 성질들은 거의 대부분이 수소원자의 그것들을 활용한 근사(Approximation)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큼은 우리 모두 수소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자.
챕터 3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부분은 리튬이온배터리에 관한 내용이다. 배터리의 역할은 전기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이는 곧 전자의 흐름이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음전하(-)를 띈 전자의 흐름이 발생하려면 양전하(+)를 띈 이온의 이동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배터리의 작동원리에 있어 현재 가장 효율적으로 여겨지면서 활발히 사용되는 것이 바로 리튬이온이다. 이에 대해 알면 알수록, 반복적인 충전이 가능하면서 성능까지 뛰어난 리튬이온배터리가 현시대를 지탱하는 불가결한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을 저절로 인정하게 된다. 리튬 자체에 대해 설명하면, 같은 1족인 수소와 마찬가지로 전자를 하나 잃기 쉬우면서 크기가 작고 비교적 가벼운 원소이다. 둘의 뚜렷한 차이점들 역시 존재하는데, 비금속성의 수소와 달리 리튬은 금속성을 지녔고 무척이나 흔한 수소와는 다르게 리튬은 꽤 희귀하다는 점이 그 대표적 예시들이다. 고작 원자번호가 둘 차이 난다는 것으로 인해 같은 족임에도 수소와 리튬이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닌다는 점은, 주기율표만으로는 모든 것을 확언할 수 없다는 걸 말해주는 흥미로운 사실이다.
첨언하자면, 나의 지난 석사 과정과 챕터 1, 챕터 3은 매우 관련이 깊다. 적외선 분광법을(Infrared spectroscopy) 활용하는 연구실에서 약 2년의 시간을 보냈는데, 그중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챕터 3에 해당하는 리튬이온배터리의 메커니즘에 대해 연구했고, 나는 챕터 1에 해당하는 단백질의 구조 분석에 대해 탐구했다. 현재의 나는 상당히 다른 영역에서 일하고 있기에 그날들의 희로애락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를 통해 자연스레 과거의 상념들이 되살아나는 것은 꽤나 드물고도 기묘하면서 소중한 경험이다.
2025. 01.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