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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롬망간 May 29. 2023

책장 파먹기

학부생 때 운영체제 과목에서 스케줄링이라는 개념을 공부하던 기억이 난다. 사용자가 여러 작업을 실행하면 컴퓨터는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각 작업들에 대한 실행 순서를 정한다. 선입선출법도 하나의 방법이고(FIFO) 실행 시간이 짧은 순서대로 줄을 세워 실행하는 방법도 있으며(SJF), 이 작업 잠깐, 저 작업 잠깐 하는 식으로 모든 작업에 시간을 배분할 수도 있고(round robin), 아니면 각 작업에 우선순위를 매긴 뒤 중요한 작업부터 실행할 수도 있다(priority). 교과서의 해당 단원 끝 부분에는 미국의 모 대학교에서 서버를 종료하려 했더니 약 20년 전에 작성된 작업이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그때까지 대기 중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곁다리로 실려 있었다.


그땐 그 이야기를 보며 웃었는데 요즘 내 책장을 보면 남말 할 때가 아니다. 책 욕심이 많아서, 혹은 내 독서 능력을 과신해서 책을 많이 사놓고는 다 읽기도 전에 책을 또 사고 하는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책장에 아직 못 읽은 책이 한가득이다. 보통 5권 사면 3권쯤 읽고 2권은 아직 안 읽은 상태에서 또 책을 사는 듯하다. 최근까지는 이 상태의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유명 작가가 TV에 나와서 "책은 읽을 것을 사는 게 아니에요. 사놓은 것 중에서 읽는 거지."라는 말을 했을 때 공감, 혹은 안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작년 말 즈음부터 뭔가 단순하고 깔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삶에 도입한 여러 변화 중 하나가 '책장 파먹기'였다. 이름에 대한 아이디어는 '냉장고 파먹기'에서 얻었다. 음식을 따로 사지 않고 냉장고가 텅텅 빌 때까지 냉장고 안에 그동안 쌓여 있던 음식만 먹는 것을 냉장고 파먹기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걸 책장에 적용하기로 했다.


일단 책을 사는 일을 멈추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자 그제야 밀려있는 책들이 무의식 중에 얼마나 내 마음에 부담으로 다가왔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컴퓨터는 작업이 밀려 있으면 쉬지 못하고 계속 돌아야 하고(CPU 점유율 100%), 그 과정에서 과열 및 저장공간 파편화 등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좀 쉬게 해 주어야(idle) 그동안 운영체제가 알아서 이런저런 유지보수와 최적화도 하고 컴퓨터 본체 온도도 좀 내려가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새 책을 사는 것을 멈추자 정말 오랜만에 머리가 쉬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생각의 한 부분이 진공처럼 비어있는 것 같아 어색했지만 적응이 되고 나니 이게 정상이고 그동안의 내 독서 양식이 비정상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사놓은 채 안 읽고 있던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책장에서 자기 차례만 기다리고 있던 책들. 이 책들을 한 권 한 권씩 읽어가면서 밀린 숙제를 해결하는 듯한 후련함, 더 정확히는 밀려있던 생각이 머릿속에서 정리되고 해결되는 개운함을 느꼈다. 책을 한 권 산다는 것은 내 머리 한 켠이 그 책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고(malloc으로 메모리 할당), 그 생각은 그 책을 다 읽기 전에는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메모리 해제가 안 된 상태). 그래서 안 읽고 쌓여있는 책이 많으면 많을수록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진다(메모리 파편화).


그렇게 밀린 책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니 머리가 맑아졌다. 밀린 책이, 아니 밀린 생각이 줄어들자 생각도 점점 잘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사로 비유를 하자면 지금까지는 이삿짐을 정신없이 집 안에 쌓아두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짐들을 조금씩 제 자리로 배치하면서 집이 정리가 되는 느낌이고, 컴퓨터로 비유를 하자면 파편화된 자잘한 메모리가 아니라 좀 큼직하게 비어있는 메모리 덩어리가 생긴 느낌이다. 더불어 한 권 한 권씩 책을 끝낼 때마다 성취감도 생기고.


요즘도 습관처럼 접속해 보는 인터넷 서점에는 흥미로운 책들이 많다. 예전 같으면 샀을 그 책들을 지금은 사지 않는다. 책장에서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책들도 내가 과거에는 흥미를 느끼고 샀던 책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오늘은 거의 10년 동안 안 읽고 있던 책 한 권을 끝냈다. 입력은 없고 출력은 있으면 내 책장도 언젠가는 텅 비게 되겠지(x(t) -> 0). 새 책은 그때 가서 사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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