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가계부

레쓰비

by 크로와상

내게 일기장은 감정 쓰레기통이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록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행복한 일이 없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 전자일 것이다. 가끔 청소병이 도지거나 이사를 할 때만 읽게 되는 일기장 속의 나는 항상 슬프고 모자란 점이 많다. 그래서 버리고 싶지만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이사할 때는 엄마 집과 내 집을 합치고 나 혼자 이사를 했기에 엄마의 집 정리는 내 몫이었다. 많은 것을 버렸다. 쓰지 않는 그리고 쓸 사람이 없는 컵, 그릇, 가구 등 많은 것을 여러 날에 걸쳐 버렸다. 내게는 일기장과 같이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 없었던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엄마의 가계부이다. 엄마는 가계부를 항상 같은 위치에 보관했다. 항상 안방에 있는 낮은 서랍장 오른쪽 칸에 있었다. 서랍을 열면 맨 위에는 항상 다른 노트가 있고 그 밑이 가계부 자리였다. 엄마는 그것을 절대 못 보게 했다. 엄마는 이러한 상황에서 딸이 그 가계부를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의 엄마의 주된 소비 내역은 300원짜리 ‘레쓰비’였다. 그리고 그 옆에 짧게 ‘속이 많이 쓰림’ 또는 ‘너무 졸려서 구매’ 등의 문구가 매일같이 적혀 있었다. 그 당시의 엄마는 거의 매일 졸리니까 커피를 마시고 그래서 속이 쓰리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 나는 엄마가 자주 마시던 그 캔커피가 싫었다. 단 맛도 쓴 맛도 아닌 어중간한 맛에 다 먹고 나서 입에 남는 텁텁한 느낌이 별로였다. 하다 만 것 같은 어지러운 디자인도 별로였고 그래서 저렴한가 하는 생각도 했다. 한 편으로는 엄마가 레쓰비를 너무 자주 마셔서 싫기도 했다. 이도 저도 아닌 제일 값싼 캔커피가 엄마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인 것 같았다. 엄마가 나와 동생을 위해서 고군분투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라는 마음도 있었다. 엄마도 너네는 나처럼 살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엄마의 의도와 달리 그 말에 내가 은연중에 엄마를 무시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든다.


그리고 엄마는 가끔 소주를 마셨다. 어떤 날은 소주 살 돈이 없어서 민호 아줌마한테 몇 천원을 빌리기도 했다. 그리고 또 어떤 날은 엄마가 소주를 사서 민호네 가서 마시기도 했다. 소주를 마시는 날에는 너무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 모른다. 아빠 때문이었는지 직장에서 일 혹은 사람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무엇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난 엄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가 왜 레쓰비를 그렇게 많이 마셨는지 몰랐고 가끔은 민호네 가서 소주를 마셨는지 몰랐다. 유학 중인 이모에게 먹을 것을 보내주면서 택배비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지만 엄마가 아니면 타지에 있는 이모를 챙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줄도 몰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계부는 엄마의 약 복용 일지로 바뀌었다. 엄마의 증세가 악화되며 동시에 경제적인 능력이 사라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 동생이 계산하니 엄마는 가계부를 쓸 일이 줄어들었다. 점차 엄마의 주된 기록은 몇 시에 약을 먹었고 증상이 언제 왔으며 그 때 보라색 약 또는 흰색 약을 몇 알 복용했는지 였다. 글씨의 크기와 필체도 달라졌다. 예전에 엄마는 글씨를 정말 잘 썼다. ‘내가 그래도 글씨는 잘 썼는데 지금은 못 쓰겠어..’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손이 떨리니 줄 안에 맞춰 글씨를 쓰는 것이 힘들어졌고 지금은 공책이 아닌 스케치북을 이용한다.


첫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이 마냥 설레지는 않았다. 왠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슬픔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괜시리 불안한 마음에 한 시간 일찍 도착했다. 책 반납과 대출을 하고 강의실에 자리를 맡고 간단히 요기를 할 생각으로 도서관을 둘러봤다. 4층 휴게실에는 자판기가 있다. 뭘 뽑아 마실까 하다가 내키는 것이 없어 지하 식당에 갔다. 키오스크가 꺼져 있는 것으로 보아 마감을 한 것 같아 매점에서 크림빵과 레쓰비를 골랐다. 계산대의 모니터를 보니 레쓰비는 천원이었다. 4층 자판기는 7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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