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말하기를 배우다.
모임에 가면 말을 많이 한다. 가끔은 사회자 역할을 자처한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해서 듣다가 첨언할 말을 재빨리 머릿속에서 정리한 뒤 적당한 타이밍에 뱉어낸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연극을 할 때 선배들이 가르쳐준 팁이 있다. 상대 배우의 대사가 끝나기 전에 내 대사를 시작해야 대화가 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도 모르게 대화의 주요한 스킬이라고 생각한 건지 일상의 대화를 연극 대사처럼 치고 있었다.
어찌 됐건 나에게 있어 모임에서의 감정상태는 대화를 '치는' 것의 긴장감과 그것에서 따라오는 쾌감 혹은 불쾌감의 연속이었고 그 시간 속에서는 굉장히 들떠있고 신나 있지만 집에 돌아오면 왠지 모를 열패감에 젖어들었다. 꽤 오랜 시간의 회복이 필요했다.
아마도 그 회복이란 영혼 없이 떠들어댔던 쓰레기 같은 말들에 대한 치유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상대의 말에 깊이 생각하고 그 말에 반응하는 대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 나 자신도 모를 때가 많았다. 가끔은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지도 않았던 주제에 대해 마치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처럼 과장했다. 또 과거에 내가 겪었던 사소한 일들을 부풀려 불행한 시간이었던 것으로 꾸미기도 했다.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이 주제에 대해 할 말이 있는 거니? 정말 네 생각과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웃고 있는 거니? 상대방의 저 생각에 감히 네가 조롱해도 되는 거니?
이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얼마 전 지인들과의 저녁식사자리에서 느꼈던 '말할 수 없음'은 사실 처음 느껴 본 것이었다. 난 늘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했고 침묵 속에 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말할 수 없음'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누군가가 대화 중에 침묵 속에 빠져들고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상처 받고 있는 것일 수도... 내가 겪어보고야 알았다.
누군가가 닭발을 먹냐는 말에 나는 요즘 고기를 먹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아직 비건은 아니지만 '비건 지향'을 꿈꾼다고 조금은 수줍게 말했다. 수줍었다는 것은 그 '지향'이라는 단어에 숨긴 비겁함때문에. 그런데 비건을 지향한다는 말 끝에 호기심을 가장한 공격과 조롱을 받았다. 그래서 자동반사적인 방어를 하느라 우스꽝스럽게 흥분했다가 문득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말하려 해도 상대방은 마음으로 들으려 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 슬펐다.
나는 조금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이 세계에서 나밖에 모르는, 내 상처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끝나고 싶지 않아서다. '나'로만 똘똘 뭉쳐져 있는 이 방에서 뛰쳐나가기 위해 세상과 연결되고 싶었다. 그때 이슬아 작가의 '비건 지향'생활에 대해 알게 됐다. 세상과 연결되려는 마음이 먹는 '고기'와 생명으로서의 '동물'을 분리했던 내 비겁함을 까발리고 인정하게 했다. 그저 내 입이 즐겁자고 습관적으로 먹었던 행동이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이슬아 작가처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시작해보자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저 맛있다는 이유로 '고기'를 먹지는 말자."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죄책감 없는 식사를 한다는 것의 자유로움은 느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르리라.
'말할 수 없음'을 경험했던 그날은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그 감정을 느껴본 것도 세상과 연결되려는 나에게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세상과 연결되고 싶다는 것은 결국은 '공감'하는 것이구나. 세상과의 연결은 내가 일상에서 나누는 사소한 대화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공감받지 못함으로써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타인에게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도 깨닫게 해 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