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의 서정(敍情)

by 여송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립니다. 늦가을 우수(憂愁)에 찬 이 가슴에 날씨까지 흐려 심란하게 하더니, 가을비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처럼 카타르시스가 되어 유리창에 흘러내립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그리움과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여인이 차라리 밤새도록 눈물이라도 쏟아버리면 다소 위안이 되듯이, 이 가을비가 내리고 나면 무거운 질량으로 짓눌린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질 것입니다.


어둠이 내려 깔리자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욱한 밤안개가 주위를 뒤덮습니다. 인적이라곤 찾을 수 없는 거리에 가로등불이 뿌연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고, 멀리서 간간이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만이 늦은 가을밤의 적막을 깨뜨립니다.


추수를 끝내 휑한 논바닥에는 어젯밤 내린 비로 물이 제법 고였고, 그 사이로 하얀 비닐로 포장된, 마시멜로우 같이 생긴 볏짚 덩어리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곤포 사일리지라는 이름도 낯선 이것은 발효를 위해 첨가제를 뿌린 볏짚을 원형의 흰색 비닐(곤포)로 여러 겹으로 감아 단단하게 포장한 것이라고 하네요. 가축의 사료로 쓰기 위한 이것은 옛날에는 볼 수 없었던 물건이지요. 시골에서 한 식구 역할을 단단히 했던 누렁이들도 요즈음엔 주인이 끓여 주던 뜨끈뜨끈한 쇠죽 대신, 비닐로 포장된 사료를 먹어야 하나 봅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머니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따뜻한 젖을 빠는 대신, 딱딱하고 차가운 깡통에 든 분유를 억지로 삼켜야 하는 현시대의 갓난아기들도 똑같은 신세입니다.

들판 위로 한 무리의 까마귀들이 떼 지어 날아오릅니다. 예전과는 달리 추수에도 기계화가 진행되어 벼이삭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논에서 그들은 더 이상 먹을 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내는 까악까악 소리는 예전의 먹잇감이 풍부하던 시절의 흥겨운 노랫소리가 아니고, 배고픔과 절망감에서 나오는 탄식과 좌절의 한숨소리입니다.


반대편 길가에는 마을의 수호신인 장승들이 쓰러진 상태로 팽개쳐 있습니다. 옛날 어머니들이 자식 잘되고 집안 무탈하라고 치성을 드리던 신성하고 영험(靈驗) 있던 곳이 졸지에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러다간 장승이 노하여 나에게 벌을 내릴까 봐 그냥 지나치기가 두렵습니다. 그러나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과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로 무장한, 정서가 메마른 요즈음의 신세대들에겐 이들 장승은 단지 미신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마을 옆을 흐르는 강물 속에서는 한 무리의 누치들이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습니다. 요 녀석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생김새가 날씬하여 민물고기 중에서 신사로 불리는 족속들입니다. 그들도 그것을 아는지 물속에서 도도하고 다소 건방지게 행동을 하고 있지만, 실은 이들도 황폐하고 메마른 자연환경 속에서 먹고 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겉멋만 늘어 신사랍시고 돈도 없이 기생집을 찾았다가는 각박한 요즘 세상에 매 맞고 쫓겨날 것이 뻔하니 차라리 집에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어야겠지요.


건너편 밭둑에서 찔레나무 열매를 쪼던 장끼가 끼~욱 끼~욱 소리를 내며 날아오릅니다. 아마도 들고양이의 습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까치들이 자기들의 밥인 이 열매를 꿩이 도적질 해 가니 고양이에게 가서 하소연했나 봅니다. 인간사회나 짐승들의 세상이나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고양이가 모처럼 의기양양해하는 것 같습니다.


아스팔트 길을 따라 늘어선 은행나무의 이파리들은 이미 낙엽이 되어 땅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뒹굴고 있습니다. 봄에 움을 틔운 후, 무성한 잎으로 자라나 여름 내내 나무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던 그들도 가을이 되자 미련 없이 나무에서 떨어져 흙 속으로 들어가, 거름이 되어 다시 은행나무를 살찌게 하고 열매를 맺도록 할 것입니다. 이런 이파리들의 희생을 나무는 알기나 하는 걸까요? 나무가 알아주든 말든 내년에는 또다시 잎이 솟아나 같은 일을 반복하겠지요.


고개 넘어 인적이 뜸한 산비탈에는 감들이 빨갛게 익어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미 땄어야 할 감들이 아직 남아있는 걸 보니 수확을 포기한 모양입니다. 여기에도 요즈음은 철저한 경제논리가 적용되어, 감나무 주인은 감을 따서 시장에 내다 판들 인건비조차 건지기 힘든 마당에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계산했겠지요.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 돈 사기 위해 농부는 먹고 싶은 욕구를 참아가며 감을 수확하면서도 까치밥 정도는 남겨두었던 그 시절의 인정과 여유가 그리워집니다.


언덕 아래 양지바른 밭둑에서는 개나리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늦가을답지 않은 따뜻한 날씨에 이들도 계절을 잊었나 봅니다. 갑자기 봄을 맞은 듯 내 얼굴이 환해지고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곧 우수(憂愁)의 계절인 늦가을 풍경을 확인하고는 다시 애잔하고 공허한 감정 속으로 빠져듭니다.


산골짝의 외딴 폐가 옆에는 버려진 우물이 쓸쓸히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한때는 집주인의 억척같은 삶의 끈을 이어준 이 우물도 도회지로 가버린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우물 속에서는 계속하여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마치 언젠가는 집주인이 돌아올 것을 믿고 있는 듯이...

밭 어귀나 산 중턱 곳곳에는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컨테이너 하우스나 자그만 이동식 주택들이 들어섰습니다. 혹독한 가난과 각박한 도시생활에서 심신이 병든 베이비붐 세대들이 하나둘씩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오면서 생기는 풍경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산업화의 역군으로서 오늘날의 자유와 번영의 밀알이 되었던 그들, 젊었을 때부터 객지에서 터 잡아 자식 교육시키고 출가시키면서 한 가정을 일으키는 밑거름이 되었던 그들, 가정과 나라를 위해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지만 나이가 들자 자식들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그들이 이젠 이 곳 전원으로 돌아와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매면서 병든 몸과 마음을 추스릅니다.


마을에서 다소 떨어진 들판 한가운데 컨테이너 하우스 한 채가 외로이 서 있고, 그 앞의 손바닥만한 마늘밭에서 초로(初老)의 남자가 김을 매고 있습니다. 가을에 파종하여 모진 겨울을 나는 이 작물은 마치 주인을 닮았습니다. 고달픈 인생살이로 얼굴에는 깊은 주름살이 파이고, 머리 위에는 하얀 서리가 내린 이 남자는 영락없이 인생살이에 있어서 만추(晩秋)를 맞이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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