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즈음에도 추석이나 설이 되면 어김없이 삼천포를 찾는다. 물론 고향에 중요한 손님이 와서 가끔 찾을 때도 있지만, 명절 때의 이 곳 방문은 선택이 아닌 필수사항이다. 방문의 주목적은 값싸고 싱싱한 해산물 구입이다. 예전에 비하면 이곳의 어획량과 포획되는 어패류 종류도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타지에 비하면 가격이나 품질 면에서 월등히 앞선다. 구입하는 해산물의 종류는 방문 목적과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데, 명절 때는 도미나 볼락, 서대, 바지락, 등 제수용 해물이 주류이고, 손님 접대 시 구매품은 광어, 우럭 등 횟감용 생선이 대부분이다.
내가 맨 처음 삼천포를 방문하게 된 것은 중학생 시절이었다. 지금은 폐선된 진삼선 기차를 타고 노산공원으로 소풍을 가면서 만난 것이 이 도시와의 첫 인연이었다. 삼천포에 대한 첫인상은 한적하고 경치 좋은 항구 도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로 한동안 이 도시에 대한 방문이 뜸했다가 1980년대 말 자가용 승용차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다시 이곳을 찾는 기회가 늘어나게 되었다. 당시는 주로 바다낚시를 위해 이곳을 찾았고, 가끔 젓갈용 멸치 구입을 위해 남해섬의 미조항을 가는 길목으로 이곳을 거치기도 하였다. 음식에 대해 철저하셨던 어머님은 싱싱한 젓갈을 만들기 위해 멸치가 나는 봄이나 가을이면 어김없이 고급인력(?)을 운전기사로 삼아 남해섬의 최남단 어업 전진기지인 미조항까지 출타하셨던 것이다. 내가 남자로서 요리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것도 어머니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요리비법에 힘입은 바 크다.
삼천포 근방에 사는 우리들이야 예나 지금이나 이 도시를 모를 리 없지만, 서울 등 먼 곳에서 자란 사람들은 ‘삼천포’를 쥐포, 북어포 등과 같이 말린 생선의 일종으로 아는 사람도 있다. 특히 이 도시가 사천에 흡수 통합되어 삼천포라는 지명이 사라진 후는 이 도시에 대한 인지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삼천포는 경상남도 남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기후가 온화하고 해안 경치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먹을거리가 풍부해 그 어느 지역보다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 왔다. 삼천포의 이러한 매력을 반영하듯 이 시는 삼천포 아가씨, 비나리는 삼천포, 노을 진 삼천포, 삼천포야 잘 있거라, 다시 찾은 삼천포 등 많은 노래와 영화의 소재가 되어 왔다.
그런데도 삼천포라 하면 "멸치가 고기냐? 삼천포가 시냐?" 하는 비아냥에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공식석상이나 방송에서 이 표현을 썼다가 삼천포 주민들의 항의를 받고 정식 사과하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삼천포는 1956년 인구 5만을 겨우 채워 시로 승격된 이후 특별한 성장이나 퇴보 없이 어업도시로서의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그러다가 1995년 사천과의 통폐합 과정에서 도시 규모에서 앞서던 삼천포가 일개 군과 읍에 불과했던 사천에 통합되어 사천시로 그 명칭이 바뀌게 된다. 당시 사천은 항공우주산업 등으로 성장하는 도시인 반면, 삼천포는 쇠락해 가는 수산업이 주력 산업이다 보니, 시 재정이 어려워 울며 겨자먹기로 사천에 통합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인지도나 역사, 문화, 관광 등 여러 분야에서 앞서던 삼천포가 지명까지 포기하면서 사천에 흡수 통합되는 걸 바라보는 내 마음마저 서운함을 금할 수 없었으니 삼천포 시민들의 상실감이야 오죽했겠는가? 행정구역의 통폐합에서까지 경제적 논리가 최우선적으로 적용되는 현실이 서글프다.
삼천포의 맨 서쪽 편에는 육지와 남해섬을 연결하는 삼천포대교가 시원스럽게 놓여 있다. 이 다리는 3개의 섬을 5개의 교량으로 잇는 것으로, 그 형식과 모양도 각기 다르다. 아치교, 사장교 등 각각의 모양은 마치 교량 박물관을 보는 듯하다. 이 다리 길은 지난 2006년 건설교통부의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대상’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옛날, 멸치 사러 미조항으로 가기 위해 카페리에 승용차를 싣고 건너던 바닷길 대신, 이제는 시원하게 뚫린 이 다리 길을 타고 불과 몇 분 만에 건너게 되었다.
삼천포대교에서 해안선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면 시내 남쪽 바닷가에 노산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정상에 오르면 와룡산·각산 등의 산과 삼천포 시가지, 삼천포항, 한려수도의 크고 작은 섬들이 내려다보이는 팔각정이 나온다. 공원 아래 해안 암벽 위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한 자리에 앉아 있는 소녀상이 나타난다. 이 소녀는 이곳에서, 도시로 떠나간 임이 고향인 삼천포로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 실화를 바탕으로 작곡되어 대히트를 친 가요 "삼천포 아가씨"의 동상인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 노래의 작곡가 유족들이 아가씨 동상에 대해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조만간 이 아가씨는 사라지거나 다른 곳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기약 없이 임을 기다려야 할 상황이다. 이러한 행동은 삼천포 시민들의 애환과 정서가 담긴 노래의 본래의 의미까지 퇴색시키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는 돈 몇 푼에 착하고 순진한 어촌 아가씨의 순정까지 팔아넘기는 각박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자괴감마저 든다.
노산공원에서 내려와 다시 동쪽으로 향하면 ‘남녘땅에서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는 뜻의 남일대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이 명칭은 신라 말의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이곳을 지나치면서 그 경치에 반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고교 2학년 시절 과외 집주인의 배려로, 그 집 아들과 운전기사 등 사춘기 청소년 3명이 함께 처음으로 해수욕을 온 곳이 남일대이다. 이곳을 방문하고는 난생처음 대하는 벌거벗은 처녀들 모습에 오히려 우리의 얼굴이 빨개지면서 눈길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쩔쩔매었던 기억이 새롭다.
다시 동쪽으로 이동하면 향로봉 중턱에 위치한, 고적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운흥사가 나타난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 절은 임진왜란을 당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운흥사는 이 지역 승군의 본거지였고, 사명대사의 지휘 아래 6천여 명의 승군이 머물렀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쟁 논의 차 세 번 방문했다고 하니 왜적들의 미움을 받을 만도 하다. 이 절은 가로 8m, 세로 12m에 이르는 대형 괘불이 유명하며, 부속암자인 천진암, 낙서암을 거느리고 있다.
추석을 앞두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삼천포로 향한다. 자가용 승용차가 드물던 시절, 명절 때면 어머니가 고향의 아지매들에게 자랑스럽게 우리 아들 차 타고 삼천포 시장 보러 가자고 하시는 통에 삼천포행 조그만 승용차는 항상 만원이었다. 옆좌석에서 조심스레 아들의 운전을 지켜보던 어머니도, 시장길 내내 차 속에서 수다를 떨던 이웃집 아지매들도 이젠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차 안에는 초로(初老)의 남자 혼자만 외로이 앉아 있다.
달라진 것은 차 속의 풍경만이 아니다. 교통량이 적어 때로는 속도위반으로 삼천포 어시장에서 산 새우값보다 두 배 이상 나가는 과태료 고지서를 받기도 했던, 진주와 사천읍 사이의 3번 국도가 밀려드는 차량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혼잡한 도로 주변에는 고층아파트가 쑥쑥 올라가고, 기름진 농토에는 항공산업과 관련된 각종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변화는 교통표지판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군데군데 서 있던 표지판에는 "삼천포 25km" 대신 "사천시청 25km" 등으로 삼천포라는 지명이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바란다. 경제적 논리에 따라 삼천포라는 지명이 사라지더라도, 삼천포가 가진 그 아름다운 풍경과 오염되지 않은 자연은 영원히 지속되기를.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각박해지는 신흥 도시의 인심 대신, 어촌 도시의 여유로움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기를. 이해관계에 따라 얄팍하게 행동하는 대도시 처녀들 대신, 지조와 순정을 지닌 삼천포 아가씨들이 사는 곳으로 남기를. 어쩌면 삼천포는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더 이상 개발되지 않은 순수한 모습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