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할머니의 마지막 눈동자

by 여송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의 신체 중에서 눈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또한 산다는 것은 사물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삶을 끝내는 것을 "심장이 멎는다" 대신 "눈을 감는다"로 표현한다. 잠자는 시간이나 명상을 할 때에는 죽지 않은 상태에서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보면 전자가 더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후자가 많이 사용되는 걸 보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시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한의학에서는 눈을 내장의 거울이라 하면서, 오장육부는 모두 눈과 관계되어 있다고 한다. 관상학에서 눈은 혼백의 집이라 하여, 눈을 감고 있거나 실명한 사람의 관상은 보지 않는다고 한다. 눈동자가 맑고 빛나야 건강한 눈으로 인식한다.


흔히 눈동자는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눈동자는 마음의 창문이 되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사물과 진리를 분별하게 해 준다. 눈동자는 사람의 건강상태를 나타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인간의 생사 여부도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의사나 구급대원들이 생사가 불분명한 사람의 눈동자에 빛을 비추어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초보적인 생사 여부의 판별법이다. 눈동자는 또 인간의 슬픔과 기쁨을 표현하는 창구로도 아용되어 인간의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한다. 따라서 입으로는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도 눈동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진심을 알고 싶으면 상대방의 입을 보지 말고 상대방의 눈동자를 바라보라는 격언도 있다.



어린아이의 티 없이 맑은 눈동자는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나타낸다. 갓난아기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눈동자 속에는 자식에 대한 무한하고 숭고한 애정이 담겨 있다. 깊은 이성적 사랑에 빠진 남녀끼리 바라보는 그윽한 눈동자에는 정열적이고 에로스적 사랑이 깃들어 있다. 또한 살인자의 핏발 서린 눈동자에는 끔찍한 살기가 서려 있고, 요부(妖婦)의 간사스러운 눈동자에는 어딘지 모를 음탕함이 배어 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장면




1977년 6월 중순 어느 날, 고향 마을은 보리를 타작할 때 나오는 탈곡기 소리와 뿌연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그날도 보리 수확이 끝난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자전거를 타고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갈 때에는 항상 전방을 주시해야 하는데, 사람에게는 영감(靈感)이라는 것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 작은 개울가를 지나칠 무렵, 오른쪽에서 뭔가 시선을 끌어당기는 듯한 이상한 예감이 들어 나도 모르게 도로 아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빨래터의 물속에 떠 있는 하얀 물체가 내 눈동자 속으로 들어왔다. 급히 자전거를 세우고 자세히 내려다보니 어떤 할머니가 앞으로 물 위에 고꾸라져 팔, 다리를 힘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뛰어 내려가 할머니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는데, 할머니의 수수깡처럼 마른 팔과 풍선처럼 가벼운 몸무게가 느껴졌다. 이 할머니는 외지에서 온 분으로, 고향 마을의 어떤 집에서 어린 아이나 돌봐주고 빨래도 하면서 겨우 밥이나 얻어먹고 지내는 처지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할머니에겐 출가한 아들과 딸도 있었는데 모두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할머니를 모실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할머니를 물에서 건져내어 개울가 옆에 눕히고 보니 얼굴이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개울의 수심은 50cm 정도밖에 되지 않아 물에 빠져 익사하기란 불가능한 상황이다. 추측 컨데, 노인이 쪼그려 앉아 빨래를 하다가 고혈압이나 심장마비로 쓰러져서 물에 빠진 것 같았다. 할머니는 겨우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점차 호흡의 간격이 길어지고 있었다. 얼굴을 씻긴 후 할머니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니 이미 초점이 흐려지고 있었으며, 무언가 간절히 애원하는 듯하면서도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할머니의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괜찮으냐고 계속 말을 걸었지만, 할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쉴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할머니의 상태로 짐작하건대, 말을 하고 싶어도 마지막 숨을 겨우 몰아쉬는 상황 하에서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게 인생의 마지막 길이구나" 하는 순간 할머니의 숨도 끊어졌다.


인간으로 태어나 70여 년을 살다가 예기치 못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 지금, 자식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한마디도 못하고,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일 한 가지도 못한 채 갑작스럽게 눈을 감아야 하는 현실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점점 흐려져 가는 그녀의 눈동자를 통해 이러한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만고불변의 진리임에도 인간은 죽음을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한 채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우리의 죽음이 언제 닥쳐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죽음이라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 우리가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장점인 동시에 단점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이 죽는 시점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경우, 인생살이에 있어서 동기부여나 긴장감이 상실되어 삶에 대한 의욕과 흥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 속에서 다소 벗어나서 보다 자유로이 생활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조차도 자각하지 못하면 긴장감이나 성실성의 결여로 그의 인생은 나태하거나 소홀해지기 쉽고, 그 결과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은 죽음을 회피할 수도 없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은 우리의 인생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생이 고달프거나 삶이 힘들다고 생각될 때면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눈동자를 떠올린다. 할머니처럼 내가 당장 예기치 못하게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랐을 때, 과연 나는 어떠한 심정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게 될까 생각하면서...


우리 같은 필부(匹夫)들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을 때 후회나 미련 없이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자기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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