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ynton Marsalis의 Magic Hour을 듣고
(음악에 대한 추상적 개념이 많습니다. 음악을 듣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곧잘 존재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감상하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윈튼 마살리스 쿼르텟의 노래 'magic hour‘을 듣는다. 그의 트럼펫 속주로 음악은 시작한다. 트럼펫은 곧 글리산도로 음과 음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투쟁의 서막을 알린다.
이 음악은 장르를 구분할 수 없다. 다만 이는 ‘역사’를 연주함으로서 아방가르드(전위) 음악으로의 지위를 쌓아올린다. 악보로 규정될 수 없는, 찢어지는 글리산도로 점철된 첫 혼란 이후로 과거의 재즈를 표방한 다양한 장르가 흘러나온다. 딕시랜드, 스윙, 비밥, 핫, 하드밥, 이스트 코스트와 웨스트 코스트…… 한 장이 끝나면 또다시 혼란이 흐르고, 혼란과 혼란 사이로 역사가 흐른다. 예컨대 윈튼 마살리스의 트럼펫 소리의 미묘한 변화는 선대의 음악가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올리버 킹, 루이 암스트롱, 클리포드 브라운, 리 모건, 마일스 데이비스, 돈 체리……
과거는 잊혀진 것이다. 과오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나의 ‘현재’와 ‘존재’를 만들어낸 거대한 뿌리이기도 하다. 이들은 투쟁하며 ‘현재’를 만들어냈고, ‘현재’또한 과거가 되어 곧 영원한 투쟁으로 들어간다. 과거의 끝없는 투쟁은 카오스를 만들어내고, 카오스는 곧 ‘무질서’에서 ‘자유’를 쟁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혼란은 자유의 동의어로서 작용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면에서 이 음악은 진정한 ‘전위’를 이끌어내고 ‘새로움’을 수확해낼 수 있다. 전진하는 것,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새로운 것이다. 단순히 고막을 울리는 작용을 넘어 이 음악은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전진하게 한다. 새로움을 인지시킨다. 모호함을 선사한다. 짧은 자유를 건넨다. 오직 음으로만 전달하는 자유의 시간, 이는 제목과 같이 ‘마법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