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아빠는 두 시간이면 다 읽을 분량이라는 이 책을 나는 약 열흘 동안 읽었다. 다른 책과 병행하며 읽기도 했지만, 읽는 내내 심장이 조이는 듯한 불편한 감정이 느껴져 쉬어가며 읽어야 했다. 한 번의 완독 후 그렇게도 궁금했던 영혜가 채식하는 이유를 나는 명확히 알아내지 못했다. 나의 식견과 생각을 정리하는 능력은 그리 넓고 깊지 못해서, 몇몇의 유튜브를 찾아보고 나서야, 이 책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https://youtu.be/7AOQWW8GJbw?si=iQpyww2vKNI22nzh
https://youtu.be/ONjbuZEouPM?si=hQMrccHJTxOv9U9k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 검색한 유튜브에서는 폭력, 억압, 자유, 고통, 질문 등의 키워드가 나왔다.
인간의 본성, 폭력성에 대한 트라우마.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얻고 싶었던 자유. 일상을 조금 다르게 사는 사람이 일상에서 겪는 날 것 그대로의 고통. 한강 작가 본인이 작품활동을 통해 사회에 던진 질문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것인가? 이렇게 살면 잘못된 것인가?’
그리고 나는 이들 중 마지막 키워드인 ‘질문’,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것인가? 이렇게 살면 잘못된 것인가?’에 생각이 머물렀다. 이 책을 읽고 뇌리에 남았던 단 하나의 구절 때문이었다.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그 질문에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았을까? 그걸 대체 말이라고 하느냐고, 온 힘을 다해 화라도 냈어야 했을까.
나 또한 동생이 있어서일까, 죽음을 고민했던 날들이 있었기 때문일까. 영혜의 질문은 내게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곧 ‘내가 이 질문을 받은 인혜라면 나는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하나.’를 시작으로, 인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스스로 나무가 될 거라며,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왜 죽으면 안 되냐는 영혜를 보며 인혜는 어디서부터 잘 못된 것인지 과거를 되짚어보기 시작한다.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그 저녁, 영혜의 말대로 그들이 영영 집을 떠났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그날의 가족모임에서, 아버지가 영혜의 뺨을 치기 전에 그녀가 더 세게 팔을 붙잡았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영혜가 처음 제부를 인사시키려 데려왔을 때, 어쩐지 인상이 차가워 보여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육감대로 그 결혼을 그녀가 만류했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까. 그렇게 그녀는 영혜의 운명에 작용했을 변수들을 불러내는 일에 골몰할 때가 있었다. 동생의 삶에 놓인 바둑돌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헤아리는 일은 부질없었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만일 그녀가 그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마침내 거기에 생각이 이를 때, 그녀의 머리는 둔중히 마비되곤 했다.
이어 인혜는 어린 시절 유독 영혜를 향한 아버지의 손찌검에 자신의 비겁함도 한몫했음을 인정하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영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 자신이 그렇듯 쉽게 아이를 버리려 할 수 있었는지. 자신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을 잔인한 무책임의 죄였으므로, 누군가에게 고백할 수도, 용서를 구할 수도 없다. 다만 소름 끼칠 만큼 담담한 진실의 감각으로 느낄 뿐이다.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나왔어야 할 피일까.
인혜는 끝까지 영혜를 책임진 유일한 사람이다. 인혜는 자책과 후회를 반복하지만, 우리는 아니 최소한 나는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녀만의 최선을 다했다. 순응도, 죄책감도, 회피도, 책임도. 이보다 더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내가 만일 끝까지 영혜를 살리려는 인혜라면 왜 죽으면 안 되냐는 영혜의 질문에 무어라 답해야 하나 며칠째 고민을 했다. 정말 왜 죽으면 안 되는 것이며, 죽으려는 것이 나쁜 건가? 의문이 들었다. 이어 자살률을 왜 낮춰야 하냐는 질문에 한 사람이 사회에서 획득할 수 있는 의미가 아깝다는 서울대생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https://youtube.com/shorts/bPP4DWtgFeI?si=ep9iTOgVvLCIqEA5
영혜에게는 이 대답이 살아갈 이유가 되었을까. 인간으로서의 삶을 저버리고서라도 폭력을 내려놓은,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영혜에게 타협이 가능했을까? 나는 무어라 설득할 수 있을까?
타인의 폭력과 고통에 안타까워하기도 때론 무감하기도 한 내가 영혜라면, 아니 나는 영혜가 될 수 있을까? 나의 타협은 어떠한가. 영혜의 채식이 나에겐 무엇일까 고민되었다. 나 또한 또 다른 영혜에게 폭력과 억압을 휘두르진 않았나.
다시 돌아와, 왜 죽으면 안 되냐는 그녀의 질문에 나 또한 옳은 답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가 살았으면 좋겠다. 이 세상이, 인간이 역겹더라도. 그녀의 저항이 용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신이 이겼으면 좋겠어.
아무도 날 이해 못 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 영혜의 음성은 느리고 낮았지만 단호했다. 더 이상 냉정할 수 없을 것 같은 어조였다.
아무도 그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나도 영혜를, 영혜 같은 사람을, 또 다른 영혜를 이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본다는 명목으로, 무심하게 영혼 없이 '그렇구나' 건조하게 말하며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 같다. 아니면 걱정이란 이유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뱉는 나의 말들은 또 다른 폭력이 될지도 모른다.
나 또한 온전히 이해받고 싶은 한 사람이면서.
나는 꽤나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때론 무신경한 사람이라, 늘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갈 거다.
살아가고자, 살고 싶은 욕망이 너무도 커서 스스로의 삶을 저버리면서까지 폭력에 저항하진 않을 것 같다.
이렇게 당신과 다른 나는, 끝까지 이기적인 부탁을 하는 나는 당신이 살아남길 바란다.
당신의 투쟁이, 당신의 저항이 오래오래 지속되어 살아남길, 살아가길. 마침내 온전히 이해받고, 이겨내길.
온 마음을 다해 바라게 된다.
덧붙여, 유튜브 해석을 찾아보기 전까지 영혜는 왜 저런 꿈을 꾸었고, 영혜를 이해하지 못했던 한 사람으로서 영혜에 대해 정신과적으로 분석한 유튜브도 흥미로웠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영상 시청을 한다면 좋을 것 같다 :)
https://youtu.be/MZIudMtnzuU?si=XwmoIqQ2bJhyYZ5K
https://youtu.be/MSGPVU0xQNI?si=o4izy3quf9HrFf8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