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깊은 연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상대가 있다면, ‘마음’ 대신 ‘몸’을 고백해 보는 것은 어떨까. 정확히는 몸의 상태에 대해서.
성적인 신체 부위의 상태에 대해 고백하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외설적이라 성희롱이 될 터이니 절대 안 된다. 심장이 어쩌고 하는 건 또 너무 흔해서 진부하니 역시 안 된다.
호흡 상태에 대해 고백하는 게 제일 적절할 것 같다. 흠모하는 매력적인 상대 곁에 서면 심장 뿐 아니라 호흡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게 사실이니까.
용기 내서 다가가, 당신은 나를 숨 막히게 만든다고 말해 보자. 상대는 심각한 고민에 빠질 것이다. 이게 사랑 고백인 건지, 내가 숨막히게 할 정도로 이 사람한테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르고 있다는 항의인 건지, 아니면 나한테서 무슨 악취라도 난다는 불평인 건지, 상대는 온갖 추측을 하며 긴장할 것이다.
고민에 빠져 긴장해 있는 상대에게 말의 진의를 설명하는 건 재미없을 테니, 대신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곡 <You Leave Me Breathless>를 휴대폰으로 재생해서 상대의 귀에 가져다 대보자. 분명 대단히 강렬한 인상을 남길 것이다.
장담한다. 왜냐하면 이 곡,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You Leave Me Breathless>는 시작부터 끝까지 강렬하게 로맨틱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운 좋게 연애가 시작되고, 연인이 되어 한 시절을 보내며 서로에게 익숙해지면 이제 호흡이 편해진다. 상대 앞에서 심장도 정상적으로 뛰고 숨도 잘 쉬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즈음부터 다시 호흡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다시 상대가 나를 숨막히게 하는 것이다. 전혀 다른 의미로.
연인끼리 다툴 때 가장 흔히들 하는 말들 중 하나는 아마도, 제발 나 좀 숨막히게 하지 마, 아닐까. 아니, 말조차도 필요 없다. 사랑과 연애에 관한 사무치도록 쓸쓸하게 아름다운 명작 ‘봄날은 간다.’에서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도 아니고, “라면 먹을래요?”도 아닌, 이영애(은수 역)가 운전하는 유지태(상우 역) 옆에 앉아서 “후……” 나지막히 내뱉던 한숨이었다. 대사 아닌 그 대사를 이영애는 참 실감나게 전달했더랬다.
은수와 상우가 크게 다툰 것은 아니었다. 상우가 은수를 구속하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전에 한번 그냥 지나가는 말로 결혼 비슷한 얘기를 간접적이나마 슬쩍 꺼냈던 게 다였다. 은수는 상우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답답했던 것이다.
우리는 연인에게 한숨을 내쉬어 보기도 하고, 숨막히게 하지 좀 말라고 짜증을 내보기도 하지만, 정작 상대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는 경우도 많다. 실은 상대가 나를 숨막히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나의 호흡이, 변해 버린 나의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다만 비겁하게 상대를 탓하는 것일 뿐.
이처럼 사랑은 숨 막히는 것으로 시작해서 숨막히는 것으로 끝이 난다. 물론 그 끝은 앞서 7장에서 얘기한 대로 End가 아니라 Fin이겠지만.
상식적으로 다들 알고 있듯이 심장과 달리 폐는 자체적으로 운동 기능을 하지 못한다. 횡경막의 운동을 통해서만 수동적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횡경막의 운동은 심장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정 상태에 따라 운동의 양태가 달라진다. 아니, 더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이란 것 자체가 단지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몸의 반응을 통해 지각되는 신체적 감각 경험에 가깝다는 게 최신 뇌과학의 잠정적 결론이라고 한다. 뻐르게 뛰거나 느리게 뛰는 심장, 가빠지거나 느려지는 호흡 등등 자율신경계의 변화에 따른 몸의 여러 반응들을 통해서만 우리는 감정을 비로소 온전히 실감나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울증이나 불안증 혹은 공황증과 같은, 우리가 심리적 고통이라고 알고 있는 증상들이 실은 감정적 고통이 아니라 자율신경계 반응에 따른 신체적 고통에 가깝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율신경계 반응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몸의 여러 반응들은 우리의 의지에 지배 받지 않고 몸이 자율적으로 알아서 주관하는 것이다.
마음의 병이 무서운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마음을 의지에 따라 통제*조절 가능한 것이라고 여겨왔다. 그래서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도 흔하게 내뱉는다. 하지만 통념과 달리, 마음의 주요 한 축인 감정 활동이 실은 우리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자율신경계의 지배를 받는 신체 반응이었던 것이다.
그럼 우울증이나 불안증*공황증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은 끝끝내 꼼짝 없이 자율신경계의 지배에 휘둘리며,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 것일까.
천만 다행히도, 답은 절대 그렇지 않다. 벗어날 수 있다. 다만 오랜 시간에 걸친 훈련, 그리고 몸과 마음에 대한 공부가 필요할 뿐이다.
재밌게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이 기나긴 훈련 및 공부의 시작과 끝에도 호흡이 있다. 끝이라고는 했지만 그 끝이 완전한 결말 End가 아니라 열린 결말 Fin이라는 점도 사랑과 닮았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감정적 고통의 실체는 쿵쾅거리는 심장, 빠르게 펌프질 하는 횡격막, 치솟는 혈압, 쪼그라드는 방광과 미친듯이 꿈틀대는 창자 등과 같이 자율신경계의 반응을 통해 경험하는 신체적 감각이지만, 이들 중에서 딱 하나는 자율신경계에 완전히 지배 받지 않고 일정 부분 우리의 의지를 통해 조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횡경막이다.
이는 우리 모두 경험적으로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심장이나 창자나 방광은 마음대로 못 해도, 횡경막만큼은 누구나 어느 정도 조절해 본 적이 있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횡경막 운동을 조절함으로써, 얕은 호흡 깊은 호흡으로 전환할 수도 있고, 호흡의 길이를 길게 짧게 바꿀 수도 있다. 필요에 따라 짧은 시간 숨을 참음으로써 아예 호흡을 멈출 수도 한다. 우울과 불안으로 고통스러울 때 쿵쾅거리는 심장이나 쪼그라드는 방광 등은 어찌할 수 없지만, 바삐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횡경막, 그 가쁜 호흡만큼은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이다. 호흡을 진정시키면 자율신경계도 따라서 천천히 안정을 찾고, 자율신경계의 지배를 받는 다른 장기들도 진정된다. 몸과 마음을 공부하고 훈련하는 것은 바로 이 호흡 조절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당장 호흡을 진정시킨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와 안정이 깃들지는 않는다. 효과는 일시적이다. 하지만 호흡 훈련을 끊임없이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효과는 점차 더 오래 지속된다.
사람의 마음은 당장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오랜 시간에 거쳐 서서히 새로운 습관에 길들이며 꾸준히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은 가능하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정념으로부터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그렇게 점점 더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일이든 취미든 과몰입하지 않고 적당히 주의를 기울이며 정진할 무언가가 있어야 하고, 규칙적인 운동과 오랜 호흡 조절 훈련이 필요하다. 마음의 고통을 오래 겪어왔다면, 평화와 안정을 되찾는 데에는 그만큼 길고 긴 훈련과 인지 치료가 필요하다. 우울증 약도 아주 크게 도움을 준다.
‘근육이 마구 떨리는데 마음의 병이라니!’라는 특이한 제목의 책이 있다. 노부부가 공동으로 쓴 일종의 투병 기록인데, 노부부의 이력도 눈에 띈다. 둘 다 저명한 사회학자다. 아내 심영희 교수는 한양대에서 근무하다 은퇴했고 남편 한상진 교수는 서울대에서 근무하다 은퇴했다. 노부부는 저명한 사회학자 답게 은퇴 생활 중에도 연구나 확회 활동 등을 활발히 하고 있었는데, 심영희 교수가 학회 세미나 준비에 지나치게 정성을 쏟으며 밤샘 작업을 하던 어느 날 그만 신경증적 질환에 걸리고 만다. 루게릭 병이나 파킨슨 병에 걸린 것과 똑같은 신체 마비 및 근육의 발작*경련이 발생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심영희 교수의 이 질환은 만성화되고 만다. 책은 오랜 시간에 걸친 그녀의 투병기와 남편 한상진 교수의 간병기를 담고 있다. 노부부임에도 한상진 교수가 책에서 아내를 ‘영희’라고 호칭하며 아내에 대한 애끓는 감정을 서술한 대목이 인상적인데, 참으로 애틋했다.
투병기의 주인공 심영희 교수의 병명은 ‘이상운동증후군’이다. 이 병이 신경질환이 아니라 신경증적 질환인 것은 루게릭 병이나 파킨슨 병과 증세는 동일하지만 그 병들과 달리 어떤 최신 검진 장비를 통해서도 신경학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 마음의 병이기 때문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마음의 병이 몸소 체험되는 것은 결국 자율신경계의 반응에 의한 신체 감각을 통해서라는 점을 상기해 보면, 이상운동증후군이란 질병도 충분히 마음의 병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말초신경계에 속하는 자율신경계가 구조적인 손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쇠약해져 만성적으로 오작동 되다가 급기야는 팔다리 등 신체운동을 주관하는 중추신경계까지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2024년 파리 올림픽 개회식 마지막 무대를 에펠탑에서 장식한 세계적인 가수 셸린 디옹Celine Dion이 앓고 있다는 강직인간 증후군이라는 병도 이상운동증후근과 비슷한 질환일 것이다. 셸린 디옹의 고백에 따르면 공황증 치료제 바륨을 의사의 오판으로 장기간 과다 처방 복용하다가 병에 걸렸다고 하니까 말이다. 만일 실제 그녀의 중추신경계에 손상이 발생한 거라면 그녀는 회복해서 올림픽 개회식 무대에 서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까지 현대 의술로는 손상된 중추신경을 재생시킬 수 없다.
심영희 교수는 대학병원 치료로도 전혀 호전되지 않아 고통 받던 중에 모 운동치료 센터를 소개 받고 그곳에서 끈질기고 긴 훈련을 통해 마침내 병을 극복해 낸다. 그런데 그 훈련의 제일 첫 걸음이 바로 호흡이었다. 특히 치료사가 내뱉는 숨, 즉 날숨을 강조했다고 한다. 날숨을 잘 쉬면 들숨은 저절로 잘 쉬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거의 모든 호흡 훈련 지도에서도 날숨을 더 특별히 강조한다. 이 점은 경험에 의한 우리의 직관과는 약간 다르다. 호흡이 갑갑하거나 답답해지면 크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려고 애쓰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니까.
그러면 왜 날슘이 이처럼 들숨보다 중요할까? 책에는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았지만, 내가 공부하고 체험한 지식을 동원해서 이해해 보자면, 들숨 시에는 몸을 긴장시키는 교감신경이 작용하고 날숨 시에는 몸을 이완시키는 부교감 신경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날숨을 잘 쉬어서 몸을 충분히 이완시키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호흡 훈련 지도에서도 들숨의 길이에 비해 날숨을 2배 가량 길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숨이 편안하게 몸에서 잘 나가면 새 숨이 제 알아서 저절로 우리의 몸으로 들어온다.
이처럼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긴 여정의 시작점에는 호흡이 있다. 그렇다면 그 끝에도 호흡이 있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
호흡을 강조하는 치료사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호흡을 잊는 것이 호흡 훈련의 마지막 미션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 점은 두꺼운 벽돌책 ‘내면 소통’의 저자 김주환 연세대 교수도 자신의 유튜브 채널 ‘김주환의 내면소통’에서 늘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주환 교수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이자 뇌과학자로서, 오늘날 AI구조 설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AI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세계적인 석학 칼 프리스턴Karl Friston과도 직접 교류하며 뇌과학을 연구한 권위자다. 김주환 교수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호흡 명상을 지도하고 있는데, 매번 처음에는 호흡 조절을 가르치지만, 시작할 때 몇 번 호흡 조절을 함께 하고 나면 시청자에게 숨을 내려놓을 것을 주문한다. 부러 계속 호흡에 신경 쓰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숨은 내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숨이 내게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고통이 몸의 고통으로서 체험되는 것은 몸의 장기들이 편안한 상태에서 벗어나 아픔으로 체감되기 때문인 것이고, 다시 평안을 되찾는다는 것은 바로 그 장기들의 활동이 안정되어 더 이상 의식으로 체감되지 않고 잊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호흡의 중요성을 명심하고 훈련하는 것은 호흡에 집착해서 의식적으로 호흡을 온종일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호흡을 놓아주고 잊기 위해서인 것이다. 때문에 호흡 조절에 지나치게 집중해서 수십분씩 호흡에만 신경 쓰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오랜 기간 공부와 훈련을 하고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마침내 일상에 평화가 찾아와도, 그래서 심장과 폐를 비롯한 장기들이 본래의 안정적인 박자를 되찾는다고 해도, 그것은 완결된 End가 아니라 열려 있는 Fin이다. 마음의 고통으로 오랜 시간 고생해 본 사람들은 안다. 다 나은 것 같아도 재발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 중 어떤 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 마냥 심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삶은 죽음 이전에는 완전한 종결 없이 연속되는 것이니, 진짜 마지막 숨을 내쉬기 전에는 그 긴 여정에서 마음의 병이 재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때는 치유의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감이 들기도 하지만, 한번 치유돼 본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도 또 다음 번에도 다시 나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기도 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에는 트라우마 못지 않게 아픔을 극복해 본 성취의 기억 또한 깊이 각인돼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신 곁에 누군가 있어 심장이 두근대고 숨이 갑갑한가? 사랑을 시작하려 하기 때문이든, 사랑을 끝내려 하기 때문이든 잠시 호흡에 집중해 보기 바란다. 숨이 잘 안 쉬어져 괴롭다고 해서 억지로 시원하게 숨 쉬어 보겠다 애써서는 안 된다. 들숨에는 신경 쓰지 말고 날숨을 천천히 잘 내쉬는 연습을 해보자. 너무 예민하게 신경 써서도 안 된다. 날숨만 잘 내쉬다 보면 들숨은 저절로 내 몸에 들어와 깃드니, 갑갑하다고 해서 신경 쓰거나 염려할 것 없다.
거절당하고 창피해질 것이 두려워 갈팡질팡하고 어지러운 마음도 호흡 조절로 조금은 진정될 것이다. 또, 오랫동안 곁에 있어준 애꿎은 연인을 탓하는 대신 그냥 변해 버린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데에도 호흡 조절이 도움을 줄 것이다. 사랑을 시작하려 할 때에도 끝내려 할 때에도 비겁해지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좋은 호흡은 당신을 비겁해지지 않게 돕는다.
강렬하게 로맨틱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곡, 존 콜트레인의 <You Leave Me Breathless>이 수록된 앨범 ‘Traneing in’은 1958년에 세상에 나왔다. 그의 음악 역사에 있어 초기작에 속하는 이 앨범이 처음발매된 당시에는 ‘John Coltrane with the Red Garland Trio’라는 무미건조한 제목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제목과 달리 수록곡들은 낭만적인 풍미가 가득하다. 처음 발매 당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11장에서 소개한, 피아노를 졸졸 흐르게 만드는 피아니스트 레드 갤런드가 피아노를 맡았다.
존 콜트레인은 트럼펫터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와 함께 재즈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인물 중 한 명이다. 존 콜트레인의 음악은 재즈 그 이상의 무엇이자, 존 콜트레인이란 인물 자체도 단지 위대한 뮤지션을 넘어 종교적 성인으로, 영적인 존재로 추앙 받는다. 물론 소개하는 곡 <You Leave Me Breathless>이 수록된 앨범 ‘Traneing in’이 나온 1958년 당시에는 단지 실력 죽이는 주목 받는 테너 색서포니스트 한 명일 뿐이었지만. 한 해 전인 1957년까지만 해도 존 콜트레인은 마약 중독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1958년은 그가 독하게 마약을 끊고 이제 막 날개를 펼치며 다시 힘껏 비상하던 시기였다.
콜트레인다운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활동 중기와 후기에 몰려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초기작 가운데서 ‘Traneing in’은 들어보지 않을 수 없는, 너무도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앨범이다.
듣다가 벅차오르는 감동에 숨이 가빠졌다면, 잠시 호흡을 조절해 보기 바란다. 특히 날숨에 집중하면서 천천히......
부록19)
존 콜트레인의 앨범 ‘Lush Life’ 가운데서 동명 타이틀 곡 <Lush Life>를 들어보자. 존 콜트레인과 레드 갤런드 트리오에 더해 도널드 버드Donald Byrd라는 트럼펫터가 함께 연주한 곡이다. 곡은 1958년에 녹음됐지만 1961년에 뒤늦게 세상에 나왔다. 이 앨범 자체가 다른 앨범에 제때 실리지 못한 녹음곡들을 모아서 뒤늦게 발매한 일종의 편집 음반 성격을 띤다. 그 때문인지 비평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는 받지 못한 앨범이지만, 내 귀에는 명작이다. 제목은 ‘술 취한 인생’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는데, 아닌 게 아니라 곡이 몽롱하고 달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