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과 거리 - 넷플릭스 <씨스파라시>를 보고

넷플릭스 <씨스파라시(seaspiracy)>를 보고 욕망에 대한 글쓰기

by 꾸깃글

욕망 1 - 틈과 거리


“아 맞기 싫다. 쫌 걱정되노.” 한 친구와 코로나19 백신 이야기를 나누다, 젊은 누군가가 백신 접종 후 사망한 기사에 대해 걱정했다. 나는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우리는 말야, 길을 걸으면서도 차에 치여 죽을 위험을 안고 살아. 항상 그 정도의 가능성은 있는 거야. 기존의 위험에 하나의 99.9%의 생존 가능성과 0.01%의 위험이 더해지는 것이어도 0.01%에 집중하는 것이 인간이야. 무서워하지 말라구. 실은 삶과 죽음 사이 틈이 보이는 건, 갑자기 그 깊이를 깨닫는 건 지금껏 그 틈을 피해 노력해왔다는 현실을 깨달을 뿐이다. 죽음에 대한 내 속마음은 숨긴 채로 대화가 끝났다. 모든 바이러스 끝에, 모든 물체 끝에, 모든 사건 끝에, 모든 시간의 날카로움 끝에 늘 죽음의 위험에 놓여있는 약한 존재라는 인식과 무기력만 존재할 뿐임에도. 백신 주사를 맞으면서 눈을 찡긋 감게 되는 것은, 순간의 아픔 - 부작용이라는 위험 - 그럼에도 감염되기를 피하고 싶은 결정의 복잡한 프로세스를 눈 깜작할 새 잊어버리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렇다 치자. 대충 주위 삶이 80년, 90년 뒤에 끝나니 나도 그렇게 진행되겠거니 생각하겠다 쳐 본다. 그리고 다시 살아갈 수 있다. 한 손에 플라스틱 컵을 들고, 항생제 가득한 육고기를 먹으면서. 이제 앵글은 그 컵에 클로즈업하여 빨대를 비춘다. 그 빨대에서 다시 수많은 뉴스 기사가 카드게임의 패 마냥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진다. 플라스틱을 먹이로 착각한 고래들, 플라스틱 빨대가 꽂힌 거북이 모습, 버려진 마스크 끈에 발이 묶여 날아가지 못하는 새들. 인간이 뺏고 만들고 버리고 다시 만든 그 씬은 너무 반복되어 클리셰가 되어버린다. 어느 순간 지루하기까지 하다. 그 영화가 끝이 나고 시작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거나 없음에 가까운 다짐뿐이다. 스크린 밖 관객은 마시던 콜라를 마저 먹고 버린다. 후우웁- 이 짧은 호흡보다 더 짧은 플라스틱 빨대의 수명은 다시 그 동그란 구멍 속으로 클로즈업된다. 그 클로즈업의 끝에 나오는 망망대해.


넷플릭스 <씨스파라시>에 따르면 인간이 사용하는 플라스틱 빨대가 당연히 생명 다양성에 해를 끼치긴 하지만, 더 거대한 주범인 플라스틱 어망을 주목해야 함을 말한다. 오염의 0.03%인 빨대가 50%인 어업에 사용되는 낚싯줄, 로프, 어망보다 더 친근해서 일까? 빨대의 구멍보다 더 촘촘한 어망의 틈을 파헤치는 감독의 시선. 그 눈빛을 따라가다 보면 더 확실해지는 정답과 해설. 문제집보다 더 두꺼운 해설집을 큰 소리로 읽자 하니 목이 메일뿐이다. 새우잡이 배에서 벌어지는 강제 노역, 바다와 생계를 빼앗겨 얇은 카누 배로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오는 젊은이들, 지느러미만 잘려서 사체로 다시 버려지는 상어들. 바다라는 영화는 넓은만큼 끊임없이 스핀 오프가 만들어진다. 고래 편, 상어 편, 새우 편, 참치 편, 연어 편.. 그리고 이름을 알기도 전에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작년 처음으로 비건 방향성을 위한 노력으로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으며 낚시 프로그램에 대한 잔인성을 깨달았다면, 이번에는 ‘아구찜’ ‘갈치조림’ ‘광어회’와 같이 우리가 주식으로 먹고 있는 특정 어종을 떠올렸다. 몇몇 어종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사용한 어망 속 수많은 물고기는 선택되지 못하고 죽은 채 버려지고, 선택된 생명은 사라질 때까지 먹힌다. 여전히 영업하는 ‘ㅇㅇ찜/구이/회’는 다시 양식이라는 공급을 개발하고, 그 양식을 위한 먹이를 맞추기 위해 또 다른 생명들이 잡히고, 바다는 오염된다.


<씨스파라시> 감독은 어릴 적 보았던 고래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잔혹한 포경 현장을 고발하고자 했다. 그렇게 시작한 여정은 용납할 수 없는 ‘왜?’를 쫓아서 전 세계 여기저기 카메라를 비추었고, 곳곳에서 ‘인간의 이기심’, ‘인간의 욕심’과 같은 정답의 힌트가 드러났음에도 더 정확한 해설을 위해 거리를 좁혀갔다. ‘지속 가능한 어업’의 푸른 스티커가 붙여져 있는 통조림 캔은 내 근처에 있다. 어업을 하는 그 바다는 멀다. 추억 속 고래는 나의 가까이에 존재한다. 물고기를 더 잡고자 하는 인간이 경쟁상대로 여기는 고래를 죽이는 일본 타이지 시는 멀다. 과연 정말 그 거리의 차이일까? 오늘 내가 먹은 회는 내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임을 당했다. 그것을 하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지금 내 ‘근처’는 아주 광활하다.


너의 집에 가까워졌어

너의 이름을 크게 불러봐도 너는 너무 멀어

멀어

아무 의미 없어진 나의 산책

너가 묻은 길을 돌아보고 다시 길을 걸어

걸어

<프라이머리 - 멀어 (feat. 빈지노)>


연인 사이가 깨지고, 발걸음이 멋대로 향할 수 있는 친근한 곳에 있는 전 애인의 집을 찾아가며 거리의 물리적인 위치와 감정적인 위치의 차이를 재는 노래다. 이를 통해서도 멀다는 단어는 거리와 어울림을 발견했다. 거리라고 하면 좀 더 ‘먼 상태’를, 그와 비교하여 틈이라고 하면 좀 더 ‘가까운’ 정도를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 차이가 있다. 틈이라고 할 것인가, 거리라고 할 것인가. 밥상 위 수많은 생명이었던 것들과 바닷속 더 많고 많은 생명인 것들과 나는. 내가 죽는 1인칭 죽음과 ‘너의 죽음’인 2인칭 죽음보다 뉴스의 어떤 사람의 죽음인 3인칭 죽음은 덜 슬프다고 한다. 채널을 돌리는 순간 잊을 수 있는. 인칭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돼지, 소, 양, 연어, 참치, 새우, 등등(이라는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는 슬픔은 부록이다)은 얼만큼의 작고 작은 연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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