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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루나 붕괴 - 40조 증발과 도망자 권도형

유례없는 암호화폐 폭락 참사. 테라, 루나 사건 정리.

by 오호선 종착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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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컴퓨터 화면에 찍힌 숫자들이 미친 듯이 요동친다. 믿을 수 없다. 한 시간 전만 해도 1달러에 맞춰져 있던 테라가 -80% 곤두박질 친다. 화면 너머 전 세계 투자자들이 경악하고 있었다.


완벽히 고정되어 있을 거라던 가치가 무너져 내리자 공포가 연쇄적으로 번진다. 수십조 원의 자산이 증발해간다. 모두가 숨죽인 그 순간, 누군가는 깨닫는다. 이것은 단순한 가격 하락이 아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대한 신화의 붕괴였다.


테라 생태계의 쌍둥이인 테라USD(UST)와 루나(LUNA)는 한때 암호화폐 시장의 총아로 떠올랐다. 서로의 가치를 떠받치는 이 두 코인은, 겉으로는 마치 “절대 무너지지 않을 구조”를 자랑했다. UST는 1달러에 가치가 고정된 스테이블코인이었고, 루나는 그 가치 유지를 위해 함께 설계된 형제 코인이었다. 더 눈길을 끈 것은 UST 예치에 대한 연 20% 이자 약속.


99757_325749_5252.jpg 사진 출처 = MBC

은행 이자의 수십 배에 달하는 이 꿈의 수익률은 투자자들의 탐욕을 자극했고, 수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돈을 맡겼다. 이 거짓말 같은 수익률을 설계하고 세상에 내놓은 인물이 바로 테라폼랩스의 대표 권도형이다. 권도형은 자신만만한 언변과 행보로 유명했다.


테라·루나의 인기가 정점을 찍던 시절, 그는 트위터 등지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을 향해 거침없는 조롱을 퍼부었다. 한 영국인 경제학자가 UST 모델의 취약성을 지적하자 권도형은 “난 가난한 사람들과는 토론하지 않는다”며 비웃었고 “코인들의 95%는 결국 망할 것이고, 그들이 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재미있다”는 오만한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NISI20220603_0001012880_web.jpg?rnd=20220603115531 CNBC 크립토 트레이더에 출연한 권도형

‘황제’로 불리며 승승장구할 때의 권도형에게 테라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자기 왕국처럼 보였다. 그의 호언장담과 화려한 트래시 토크는 오히려 투자자들에겐 묘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던 20% 이자 약속도 권도형은 “지켜낼 수 있다”고 큰소리쳤고, 수많은 전문 투자자들마저 이 말에 현혹되어 거대한 자금이 테라로 몰렸다.


하지만 눈부신 질주는 이미 폭주 기관차처럼 레일을 이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테라와 루나의 알고리즘 연결 고리는 보기엔 정교해 보여도 한 번 균형이 깨지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치명적 설계 결함을 안고 있었다. 높은 이자를 지급하기 위해선 언제까지나 새로운 수요가 유입돼야 했고, 코인 값이 오르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구조였다. 밖에서 보긴 어려웠지만, 거대한 거품의 표면에는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폭락의 서막

2022년 5월 초순, 마침내 악몽이 시작되었다. UST의 가치가 1달러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1달러를 유지하던 마법의 고리가 끊기자마자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1UST를 1달러어치 루나로 교환할 수 있게 한 알고리즘은 위기 국면에서 독이 되었다.


97479_111851_1643.png 당시 루나 차트

UST를 지키려고 할수록 새로운 루나가 쏟아져 나왔고, 코인 가치는 걷잡을 수 없이 폭락했다. 투자자들은 패닉에 빠져 UST를 팔아치우려 했지만, 그럴수록 루나의 공급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며 가격을 붕괴시켰다. 이른바 죽음의 나선이 펼쳐진 것이다.


테라폼랩스와 권도형 측은 사태를 막아보려 안간힘을 썼다. 비상시에 대비한다며 모아둔 비트코인 준비금 수만 개를 서둘러 시장에 풀어 UST를 방어하려 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테라 프로젝트는 8만 개가 넘는 비트코인을 쌓아두고 있었다. 그러나 공포에 질린 시장을 안정시키기엔 역부족.


준비금으로 동원된 3조 원대의 비트코인은 순식간에 거래소로 이체되었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UST의 가격은 1달러에서 0.1달러 아래로 폭락했고, 한때 10만원을 넘보던 루나 코인은 휴지 조각 취급을 받으며 1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값이 되었다. 그 한 주 동안, 약 40조 원에 달하는 시가총액이 증발해버렸다. 고요했던 새벽을 피로 물들인 테라·루나 폭락 사태는 전 세계 금융사에 손꼽힐 만한 대참사로 기록되었다.


일부 투자자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와 참담함을 더했다. 암호화폐 업계 전체도 충격에 휩싸였다. 58조 원 규모의 자금이 일주일 새 증발하자, 다른 코인들도 연쇄 폭락했고 전반적인 시장 신뢰가 뿌리째 흔들렸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서,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권도형은 돌연 자취를 감췄다.


도망자 권도형

20226431664263357.jpg 테라·루나 폭락 사태와 관련한 폭락 사태와 관련해 실패를 사과하는 장면

붕괴 직후의 권도형은 믿기지 않을 만큼 담담해 보였다. “나는 대부분의 자산을 잃었지만, 사기친 건 아니며 그저 실패했을 뿐”이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러나 수사를 앞둔 그의 행보는 석연치 않았다. 검찰은 곧바로 권도형과 테라폼랩스 관계자들을 사기 등 혐의로 수사하기 시작했다. 2022년 9월, 서울남부지검은 권도형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고 인터폴에 공조를 요청했다.


인터폴은 즉시 적색수배령을 내려 전 세계 사법망을 총동원했고, 권도형은 그때 싱가포르에 있다 알려졌으나 정작 수배 직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한국과 미국 모두 권도형을 찾아나섰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와 검찰은 수십억 달러대의 사기 혐의로 기소하고자 움직였고, 한국 검찰도 자본시장법 위반 등 혐의를 적용해 쫓았다. 그러나 권도형은 “나는 도망 다니는 게 아니며 숨을 생각도 없다”는 말을 남긴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권도형은 수배령이 떨어진 지 한 달 뒤인 2022년 10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 'codokoj22'라는 이름의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려 한 정황이 포착되었는데, 이는 범죄인 인도 조약이 없는 국가에서 새 신분과 법인까지 마련하며 은신을 꾀한 셈이다.


201765524_1280.jpg 사진 출처: SBS NEWS

2023년 3월, 몬테네그로의 포드고리차 공항에서 수상한 아시아인 남성이 가짜 여권으로 출국 비행기에 오르려다 체포된다. 몬테네그로 내무부 장관은 “세계적인 지명 수배자를 붙잡았다”며 그 남성이 권도형임을 암시했고, 체포 당시 코스타리카 위조 여권과 벨기에 가짜 여권 등 여러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권도형은 한때 “숨은 적 없다”던 말이 무색하게 철창신세가 되었다.


남은 미스터리, 끝나지 않은 이야기

테라·루나 사태에는 아직 베일에 싸인 대목이 많다. 무엇보다 거대한 돈의 흐름이 오리무중이다. 투자자들에게서 빨아들인 막대한 자금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일부 추적에 따르면 권도형과 테라폼랩스는 테라 붕괴 이전 수개월 동안 매달 8천만 달러(약 1천억 원)에 달하는 회사 자금을 빼돌려 비밀 계좌로 옮긴 정황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마지막 방어선이었던 비트코인 준비금 대부분이 UST 방어 과정에서 사용됐다지만, 실제로 어느 정도가 팔렸고 혹여 일부가 다른 용도로 숨겨졌는지는 명확히 밝혀진게 없다.


사라진 코인들의 행방을 쫓고 있지만, 여전히 퍼즐 조각들이 흩어진 채다. 혹자는 권도형이 사전에 거액의 자금을 안전한 곳으로 빼돌렸고 그 비밀 열쇠를 아직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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