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치료사의 시선
나의 편견은 이미 균열이 생겼다 : <휴먼카인드>
글. 구수정
“인간의 본성은 과연 선한가? 악한가?” 이런 원론적인 질문에 인간은 오래도록 고심해왔다. 당대 문화와 정치, 종교와 같은 인간을 둘러싼 여러 사회적 환경은 이 질문에 대해 다르게 해석되기도 하며, 의도적으로 대중을 호도하기도 하였다. 저자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방대한 자료와 그에 대한 사실을 끝까지 추적해가며 확인해간다. 그 과정에서 내린 결론은 바로 이 책의 제목과도 같다. 대부분의 사람은 선의를 지니고 있다(<De Meeste Mensen Deugen>, 역자의 해석을 필자가 줄여 실음)는 것이다.
2023년 5월 <휴먼카인드> 특별판이 출간되었다. 2019년 네덜란드 출간 이후 24개국으로 판권이 판매되었으며 한국에서는 2021년 첫 출간된 이후 2년만이다. <휴먼카인드>는 한국은 물론 세계의 역사학, 미래학, 사회심리학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추천하며, 유명 언론사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카이스트 [지성과 문명:인간]수업의 도서목록에 포함될 정도로 대학생의 필독서가 되었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이 선하다는 대전제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지금도 지구 한쪽 편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탄도미사일 실험을 계속한다. 이런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저자는 일명 ‘팩트체크’를 한다. 전쟁 상황에서 실제 사람이 사람을 (조준하여) 쏘아 죽이는 상황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의 예를 들며 군인들은 장전된 총을 다시 2중 3중으로 장전하며 시간을 벌었고, 총을 쏘려 하지 않았다. 전쟁의 사상자는 원격 소총이나 사람과 사람이 대면하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다. 영화나 미디어에서 보던 ‘전쟁광’은 현실과는 달랐다는 점이 충격이었다.
필자의 뒤통수를 세게 친 사례는 이 뿐만이 아니었다. 인간의 악함에 대해 자주 근거로 등장하면서, <총·균·쇠> 저자이기도 한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자주 언급하는 “이스터섬”사건의 진실은 알려진 바와 달리 잘못된 인용과 확대재생산이 만들어낸 소설이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은 아주 간단하다. 갈등적 요소를 집어 넣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이야기를 더 기억하고 일반화하기 마련이다. 필자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몇몇 오해를 이 책에서 읽고 사정없이 깨부수며 충격에 여러 번 책을 덮었다 다시 열었다. 과연 내가 가진 세계의 진실은 얼마만큼 무엇에 의해 왜곡되었는가 답답한 가슴을 치면서 말이다.
저자는 문장 하나하나에 주석이 달려있을 정도로 허투루 쓰지 않았다. 우리가 인간본성을 악으로 오해하게끔 한 방대한 양의 자료를 저널리스트답게 하나하나 추적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 과학·심리학의 연구방법, 기업, 정치, 교육 전반을 깊숙이 다룬다. 저자가 인간본성을 탐구해가는 방식은 여느 연구자 못지않게 치밀하며 침착하다. 이를 기반으로 저자는 독자에게 완곡한 설득을 해나간다. 독자는 이 많은 이야기들을 머리에 우겨 넣을 필요는 없다. 500장 분량의 두꺼운 책이었지만 천천히 하나씩 설득해나가는 저자의 화법이 흥미를 놓지 않고 완독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생략)... 이상하게도 우리 자신의 죄 많은 본성을 믿는 것은 위로가 된다. 그것은 일종의 사면을 제공한다. 만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쁘다면 참여와 저항은 노력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죄 많은 본성에 대한 믿음은 또한 악의 존재를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 증오나 이기심에 직면했을 때, 당신은 ”아, 그건 그냥 인간의 본성이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믿는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이는 참여와 저항에 가치가 있음을 의미하며, 행동할 의무를 우리에게 부과한다.” (249쪽)
이 문장들에서 어떤 관점의 전환이 한 인간 삶의 종적 변화와 더불어 사회의 횡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즉 ‘선함의 힘’ 말이다.
어째서 실제 상황에서 실제 사람들의 행동을 담은 실제 영상을 보지 않는 것일까?”(267쪽)
저자는 방관자 효과에 대한 사회심리학 관련 실험에 관해 언급하면서 덴마크 심리학자 마리 린데고르와 대화한 것들을 이야기한다. 린데고르는 실험 및 설문지, 인터뷰를 고안해 내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최초의 연구원이라 한다. 사회심리학적 실험들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실험의 구조화에 어떤 함정이 있는지, 해석의 주관성, 또는 실험 자체의 목적성이 결국 실험의 결과를 얼마나 좌우하는지 자명한 일이다. 여러 심리학 관련 연구물(특히 석사학위)에서 목격되는 웃지 못할 일이기도 하다. 눈맞춤을 몇 번 하는지, 손을 몇 번 까딱였는지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눈맞춤이 한 번 이루어지더라도 진정한 의미의 눈맞춤이었다면 열 번의 눈맞춤보다 중요하다.
린데고르가 “어쨋든 현대 도시에는 감시 카메라가 빽빽이 들어차 있지 않은가?”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부분에서 통쾌함에 웃음이 났다. 물론 개인의 심리적인 미묘한 부분을 담을 수는 없겠지만 구조화된 실험보다는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운 관찰이 가능할 것이다.
그밖에 저자가 언급한 ‘공감’의 몇 가지 부분에 동의한다. ‘공감은 스포트라이트’(302쪽)(물론 이것은 심리학자 폴 블룸의 말이다)다. 공감은 실질적인 측면에서 절망적으로 제한된 기술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그보다 더 넓은 인류애에 관련된 것은 ‘연민’으로 보았다. ‘공감(共感)’은 심리상담에서 자주 활용되는 기술이다. 공감은 집중조명과 같으며 ‘피해자와 동일시할수록 적에 대해 더 일반화 하기 때문’이라는 서술에 일부 같은 의견이다. 허나 연민은 한 발 물러서서 객관적으로 보는 시선이지만 상대방을 좀 더 아래로 보는 뉘앙스가 있기 때문에 용어의 사용이(또는 번역이) 적절한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연민(憐愍), 일명 ‘측은지심(惻隱之心)’의 기술은 국제아동구호단체에서 모금 할 때 많이 쓰인다. 연민의 주체는 마음이 편할지 모르지만 연민을 받는 사람은 기분이 어떠할지 생각해보라.
또한 공감이 집중조명이라면 인생에서 한번쯤은 집중조명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저자의 말대로 ‘더 나은 세상은 더 많은 공감에서 시작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한 개인의 인생을 더 낫게’ 해 줄 수는 있다. ‘연민’을 ‘공감’의 대용하자는 주장은 완벽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물론 아직 내가 깨지 못한 오해일 수도 있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선함’이라는 건 인간의 생존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것이 본능이라면 본능이라 할 수 있겠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서로 물어뜯는 것보다는 돕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유구한 인류의 삶 속에서 깨달은 진리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함을 가지고 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약한 이를 돕고, 나이든 이를 부양한 덕분에 인류의 수명이 길어진 것이 아닐까. 인간의 악함은 손에 꼽지만 인간의 선한 행동은 자주 보여진다. 그것이 뉴스거리나 히어로물의 빌런처럼 눈에 띄지 않더라도.
저자는 결국 대체로 인간은 선한 편이며, 공동체가 긍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선함을 지향하는 편이 좋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덮고 나서 떠오른 첫 번째 문구는 조엘 오스틴의 “인간은 생각한 대로 산다”였다. 지금까지 인간의 본성에 관해 이기심과 악함에 기울여 면죄부를 주었다면, 그리고 그 생각이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주입된 생각이었다면 이 책은 생각의 전환을 해줄만한 좋은 스위치라 여겨진다.
그 방대한 레퍼런스가 서구문화권 중심으로 이루어진 한계가 있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그러나, 누군가의 추천사처럼 세상이 달라져 보인다는 말은 참이다. 완벽히 설득당하지 않더라도 당연한 것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는 마법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한마디로 세상을 보는 ‘시야 해상도’가 높아져 뉴스의 제목, 유튜브의 섬네일이 다르게 보인다. 심지어 이 책의 한국 언론사 서평까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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