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씨어터 심청-국립창극단x전주세계소리축제
판소리 다섯 바탕의 유효기한은 언제까지일까. 삼강오륜으로 점철된 전통판소리는 시대가 흐르며 점점 현실과의 벽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심청가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효(孝)의 결정판이다. 심청가를 부르는 지금의 소리꾼에게는 자신의 정서와 너무나 괴리된 내용으로 이제 심청가의 유효기간은 다 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결국 이야기는 시대성과 맞물려 재탄생되거나 사그라져야만 하는 것이다.
2025년 판소리극 ‘심청’(이하 심청)만큼 후유증이 긴 작품도 없을 것이다. 국립창극단과 전주세계소리축제가 공동기획하였고, 요나킴이 연출을 맡은 ‘심청’은 소릿길은 그대로 두고 장면을 완전히 재맥락화 하였다.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초연하였으며, 9월 다시 국립극장에서 올라 관객을 만났다.
심청의 핵심은 ‘눈’이다. 눈은 시각적인 정보를 담는 기관이자 비언어적 소통을 가능케 하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눈빛만으로도 상대가 호의적인지 적대적인지 알 수 있으며, 시선이 향한 곳에 바로 욕망이 있다. 필자는 심청을 둘러싼 ‘눈’ 그러니까 시선에 주목하고자 한다.
먼저 카메라의 시선이다. 의도된 집중과 집요함은 정확히 계산되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영정사진이나 옷장 속, 무대 위 잘 보이지 않는 냉장고 속 인형을 보여주는 장면은 친절함마저 느껴진다. 뺑덕의 불안한 발걸음을 따라가고, 때론 너른 무대 위 덩그러니 누워 소리를 하는 심봉사의 일그러진 표정을 바짝 당긴다. 마치 관객에게 이건 놓쳐선 안돼!라고 하는 것처럼. 카메라를 통해 각도를 다르게 보는 재미도 있다. 무대 안쪽에서 객석을 향하게 비추어 관객조차도 이 극의 일부가 되기도 하며, 배우의 실루엣을 다각도로 쫒는다. 마치 카메라맨은 르포의 한 장면을 담듯 무대에서 배우들과 거리를 유지 한다.
두 번째 시선은 뺑덕의 시선이다. 뺑덕이 중반부부터 나오는 원작과 달리 ‘심청’에서는 첫 장면 곽씨부인의 장례식장에서부터 등장한다. 대사 없이 심청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지만 그 시선이 순수하지만은 않다. 심청을 찬찬히 파악하면서 핵심 사건을 일으키고 주변을 이용해 욕망을 채운다. 그의 욕망에는 어린 소녀 또는 가장 나약한 계층을 뒤에서 조정해 이득을 채우는 현실의 누군가를 적나라하게 투영한다.
세 번째 시선은 코러스의 시선이다. ‘심청’에는 많은 코러스가 등장한다. 장례식장, 새 여자들, 심봉사가 승려(낮선 남자)의 만남, 뱃사람들, 맹인잔치 장면 등 코러스가 떼창을 부르지만 이들의 시선은 서늘하다. 분명 같은 장소에 있지만 심청에게 위로의 말을 걸지 않는다. 다수의 서늘한 시선은 심청이 위기를 극복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청이 어려움에 처해도 그저 방관하는 방관자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관객의 시선이 있다. 마치 지나친 몰입을 억제하는 듯 무대 위에는 배우들의 연기와 영상이 혼재되어 있다. 관객은 배우의 연기와 영상을 동시에 쫓으려 애쓰다 보면 어느 것 하나는 놓치기 마련이다. 막이 끝나면 박을 깨는 듯한 소리북의 매화점으로 관객을 깨운다. 이건 극이야! 라고 하듯. 만약 음악이 극의 몰입을 강요했다면 우울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관객을 철저한 관찰자로 또는 관객석에 묶여 절대로 심청의 일에 끼어들 수 없는 방관자가 된다.
심청은 검정 뿔테 안경을 쓰고 “아버지는 저를 아들 겸 믿사옵고”라고 하며 마치 효에 주문을 거는 듯 하다. 심청의 눈은 검은 천에 가려진 채 변고를 당한다. 장승댁 아들이 전리품처럼 심청을 사진으로 찍기도 한다. 이런 장면은 왜곡된 시선을 그대로 노출하면서 불쾌감을 일으킨다. 이렇게 심청을 향한 많은 시선들은 냉소가 깃들어 있다. 심지어 아버지 심봉사까지도 사욕에 멀어 있다. 어째서 원작에 있던 연대의 조력자가 모두 거세된 채 누구 하나 불의에 고군분투하는 심청을 향해 따뜻한 시선을 두는 어른이 없단 말인가. 심청이 가로등에 기어올라 전등을 켜고는 낙하하는 장면에서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설치하다 열차에 치어 숨진 19세 청년이 떠올랐다.
심청의 모습은 어린 소녀로, 15세 소녀로, 춤추는 여성 또는 노파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눈을 떴지만 뜨지 않은 맹인들에게 둘러 쌓여 떨어진 또 다른 심청을 끌어안으며 뒤늦은 오열을 하는 심봉사, 마치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것처럼 멀리서 지켜보는 다른 심청은 이윽고 무대와 같은 제 세상을 박차고 나온다. 바뀌지 않을 빌어먹을 세상, 방관자로 가득 찬 극장을 비웃으며. 결국 눈을 뜬 건 심청 자신이었다. 아무리 절규해도 모두가 바뀌지 않으면 결국 그대로란 것을 자각(awakening)하게 된 것이다.
눈을 감고 들으면 우리가 얼마나 시각적 정보에 휘둘려왔는가를 알 수 있다. 사람이 받아들이는 새로운 정보가 한 번에 너무 많으면 소화하기 어렵다. 판소리 강산제 심청가를 오롯이 담아낸 판소리극 심청이, 오히려 눈을 뜨면 우리가 길들여진 심청과의 괴리가 더욱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낯설게 함으로써 익숙한 소리에 대한 관성을 깬다. 낯선 방식의 발림에도 배우들은 마음껏 다루치며 소리 속을 채웠다. 판소리극 심청에 음악이 없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강산제 심청가는 음악이 아닌가란 연약한 질문이 되고 만다. 여태껏 한 두달 사이 작창하여 올리는 창작된 창극보다는 오히려 소리 짜임은 훨씬 농익었으니.
텍스트는 그대로 쓰되 반복을 통해 뉘앙스를 달리하거나 강조하는 방식은 꽤 흥미롭다. 장승댁 부인이 심청에게 반복적으로 “딸 같이 여기리니”라는 부분은 말과 달리 심청을 이용하려는 욕망이 드러나고, 관객으로 하여금 많은 전경을 떠올리게 하였다. 딸 같아서라는 말 뒤에 우리는 얼마나 험한 꼴을 보았는가. ‘심청이 인당수 빠지는 대목’을 반복하여 다른 장면을 연출한 것도 소리의 이면을 폭넓게 활용하였다. 더블 캐스팅을 통해 같은 소리와 같은 장면을 다른 배우가 표현해내는 것도 인상적이다. 최우정의 심청은 환경에 의해 변화되는 위기에 무기력한 반면 김율희의 심청은 보다 적극적으로 저항한다. 김준수의 심봉사는 아주 카메라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극대화해 그 적응력에 놀랐고, 잔상이 오래 남은 심봉사는 유태평양이었다. 캐스팅의 조합에 따라 또 시너지가 다르니 다시 찾아 볼만 하다.
심청의 관객 반응은 극과 극이다. 초연 당시 1막이 채 지나지도 않아 불쾌감을 토로하며 퇴장한 관객도 있던 반면, 심청에게 완전히 매료된 이도 있었다. 명작이라며 강요하듯 교화시키려는 이도 있고, 처음부터 보기를 거부하는 이도 있다. 60대 여성에겐 리얼리즘, 20대에겐 구태의연한 여성 피해자의 전형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상반된 시각을 갖게 된 걸까.
바로 인생에 따른 경험치와 환경이 버무려진 거대한 빙하에서 결국 나의 가장 숨기고 싶은 무언가가 작품에 투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각자의 안경으로 작품을 바라본다. 작품은 현실을 은유 가득한 현미경처럼 밀도 있게 보여주었고 당신이 방어하고 싶은 초자아(Superego)에 균열을 내었다. 누군가는 자신을 심청에 투사하고, 또 누군가는 방관자에 투사한다. 또 누군가는 심봉사의 바지가 벗겨지는 장면에 자신을 투사하여 불쾌감을 느끼고, 소리에 인생을 건 이는 심청가의 다른 이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판소리를 둘러싼 다양한 세대와 인생들이 충돌하고 방어한다. 창작자는 이렇게 다양한 층위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에 관객의 반응까지 이미 계획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전통판소리가 겪어야 할 통증이지 않을까. 지금 앓지 않으면 창극의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