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C, USA
늘 되던 것도 환경이 바뀌면 평소처럼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평소에 잘 되던 카세트 테이프 녹음기가 꼭 중요할 때에는 작동이 되지 않거나, 왠지 길이 엇갈릴 것만 같아 전화를 하면 통화 중이거나 아니면 받지 않거나. 급한 날은 꼭 자동차에 기름이 없다. 평소에 잘만 뒤집던 달걀 프라이도 낯선 손님을 맞이하면 꼭 달걀노른자를 터트려 먹기 일쑤. 밥은 쿠쿠가 해주는데도 질척 질척하다. 어떻게 그렇게 알고 그런 건지 모르고 그런 건지. 누군가 보이지 않는 마법의 힘으로 날 방해하는 건지 참 미스터리이다.
그날은 유난히도 일이 잘 풀렸다. 마침 주말에 나는 이 먼 곳 뉴욕까지 와서 해변을 가지 않으면 어떡하냐고 얘들을 살살 꼬셨다. 이 뜨거운 여름에 뉴욕과 바다가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집 떠나 온 지 1주일 잔뜩 꿈에 부푼 녀석들을 붕붕 띄우는 데에는 딱히 특별한 재주를 부릴 필요는 없었다. 다만 살랑살랑 바람만 잡을 뿐이다. 어찌어찌하여 우리는 수소문 끝에 맨해튼에서 가장 가깝다는 롱비치를 기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출발하기 전 빅토리아 시크릿에 들러 그럭저럭 화끈한 비키니도 하나 골랐다. 이거 뭐 다 가려지겠냐 싶은.. 하지만 여기 빅토리아 시크릿에선 그나마 노멀 한 디자인을 겨우 사이즈에 맞추어 샀다. 풀어지지 않으려면 다섯 번은 꽁꽁 묶어야겠다면서 말이다.
중앙역에서 간단하게 티켓을 끊어 약 40여분 기차를 타고 우리는 롱비치로 향했다. 롱비치. 참 이네들은 이름 짓는 것도 간단하다. 기다란 해변이면 무조건 롱비치라니. 어찌어찌하여서 해변에 도착. 그때 시작은 1시. 태양은 뜨겁고 바다는 눈부시다. 어서 우리는 눈에는 선글라스를 장착하고 타면 안 된다며 선크림을 대충 부어 바른 다음 바다로 뛰어들었다. 참을 수 없었다. 한참 물놀이를 즐기고 사진을 찍고 꺄악꺄악 소리 지르며 노는 동안 키 크고 윈드서핑을 즐기는 금발 남자와의 즉석만남 따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긴 해운대가 아니니까 뭐 기대도 안 했지만. 하긴 조그만 동양 여자애들이 초등학생처럼 뒹굴고 노니 우릴 어린이로 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여하튼 이것이 중요한 건 아니다. 결정적인 일은 그다음부터다.
신나게 바다를 휘저으며 놀다 지쳐 우리는 다시 돌아오는 기차를 탔다. 너무 무리하면 안 된다. 우리는 내일부터 다시 힘든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계획은 해가 지기 전 우리는 맨해튼에 도착해 초가에서 주중에 못 먹었던 한정식을 먹는 거다!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기면증처럼 잠이 들어 버렸다. 도착할 때 즈음 뭔가 이상했다. 가슴 언저리와 등짝이 따끔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땡볕에 놀았나 싶었다. 나는 자고 있던 일행들을 깨웠다.
"나 등짝이 좀 이상해 봐줘."
"잠깐만...... 어헛!! 세상에나...... 어떡해!!"
"왜왜!!!"
"선크림이 성능이 너무 좋았나 봐!"
내 등짝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손에 선크림을 묻힌 채로 등을 발랐는데 내 손이 안 닿는 부분에는 선크림이 발라지지 않아 벌겋게 익어버렸고, 선크림이 발라진 곳에는 하얗게 손자국이 남은 것이다. 앞은 더 가관이었다. 수영복과 맨살의 틈새에 선크림이 골고루 발라지지 않아 마치 반달곰처럼 태양에 그을리고 말았다. 이럴 수가!
"안 아파? 아파 보이는데......"
왜 안 아프겠니...... 탄 곳도 아프고 내 맘도 아파...... 하루가 지나니 더욱더 따끔거리고 옷이 스칠 때마다 아팠다. 사람들은 나와 인사하면서 나의 새카맣게 탄 가슴을 한번, 내 얼굴을 한번 걱정스레 혹은 웃음을 참으며 안부를 묻는다. 웃프다. 어휴. 이런 자외선, 처음이다. 한국에선 대충 발라도 커버가 되던 나의 선크림은 롱비치의 타오르는 태양을 맞아 마음껏 제 몫을 해준 것이다. 그래 이런 게 바로 선크림의 효능이지. 꼼꼼하게 바르지 않은 내 잘못이 크다.
그 뒤로 나는 단군이래 사람에서 반달곰으로 변신하였다는 슬픈 전설. 마늘을 먹어야 하나. @2008 NYC, USA
*사진은 구글에서 가져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