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acas, VENEZUELA
처음엔 나도 잘 몰랐다. 그저 팔이, 몸이 좀 간지러웠다. 손으로 가려운 곳을 살짝 긁적였을 뿐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문득 가려운 곳을 살펴보니 벌겋게 달아올랐다. 뭐가 물렸나? 에잇, 귀찮게 되었군. 그냥 벌레 물린 데 바르는 연고를 당장 집에 가서 발라야겠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가려운 곳이 그곳뿐이 아니었다. 점점 목도 간지럽고 얼굴도 간지럽고.. 서둘러 집으로 와 거울을 보니 붉은 반점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자세히 보니 벌레는 아닌 것 같아 연고 바르는 일은 그만두었다. 조금씩 열이 나는 것도 같다. 샤워기를 틀고 팔과 얼굴을 차가운 물속에 담가본다. 왜 이러지? 내가 더러워서 그런가. 이내 옷을 벗고 거품을 잔뜩 내어 몸을 씻어보아도 붉은 생채기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이거, 왜 이런 거지? 차가운 물속에서 눈물은 뜨겁게 내 뺨에 흐르고 있었다. 원인 모를 증상에 관한 답답함. 붉은 기운은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하..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서둘러 물기를 털어 낸 후 다시 거울을 보았다. 세상에나, 왼쪽 눈두덩이에 붉은 훈장처럼 깊게 새겨진 생채기. 설마... 아아.. 이럴 수는 없어!!!!!
몇 년 전, 중남미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베네수엘라에서 아르헨티나로 넘어가기 하루 전, 아쉬운 마음에 바닷가를 찾았다. 섬 하나 없이 바로 펼쳐지는 대서양. 시원하고도 높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끝내주는 파도. 서퍼들의 화려한 향연. 뜨거운 태양. 환상 몸매의 비키니 역시 베네수엘라. 그중 파도타기는 최고의 놀이였다. 한국의 놀이공원에서 만들어 주는 인공 파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한참 파도타기에 열중하다 그늘에 들어와 시푸드를 즐겼다. 역시 바닷가라 그런지 해산물이 풍부하고도 맛있었다. 우린 신나게 하루를 보내고 행복한 추억을 안고는 바로 아르헨티나행 비행기를 탔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다음날, 나의 왼쪽 얼굴 눈두덩이에 미간부터 눈 끝까지 일자로 벌겋게 생채기가 난 것이다. 어디에 긁힌 것인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붉은 상흔, 병원을 가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애매모호한 "풍토병", 며칠이 지나도 이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속상했다. 말도 안 돼. 다른 곳도 아닌 얼굴에.. 자꾸 모자만 쓰게 되고 사람들을 대하기 힘들어졌다. 즐거워야 할 여행이 악몽이 되어버렸다. 상처가 여행의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남몰래 화장실에서 많이 울었다. 그냥 있어도 눈물만 났다. 당장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우리는 일정이 두 달이 넘게 남아 있었다. 맙소사... 이 얼굴로 계속 살아야 한단 말인가? 20대 초반 젊은 여자아이의 얼굴에 난 손가락 굵기만 한 상처는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것도 여행지에서.. 도대체 원인을 알아야 약이라도 먹고 고치기라도 하지. 퉁퉁 불은 왼쪽 눈두덩이..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후 아르헨티나에서부터 찍힌 사진들은 웃고 있지만 모두 얼굴에 상처와 함께 있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결국 이 상처는 한국을 돌아와서도 몇 개월을 갖고 살다가 자연스레 사라졌다.
"음... 알레르기 증상 같은데... 오늘 뭐 먹었어요?"
의사가 물었다.
"점심에 김밥 먹은 게 다예요."
"무슨 김밥 먹었는데요?"
"날치알 김밥?"
"그거네... 날치알이 상태가 안 좋았던 모양이네요. 원래 안 익힌 해산물은 여름에 조심해야 해요. 특히 알.."
"그렇군요.. "
"약 처방해 드릴 테니 밥 먹고 드세요. 저녁 안 먹었죠?"
"네.."
의사가 증상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해주니 뭔가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면서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그러고 보니 지금 벌써 밤 10시인데 낮 12시에 점심을 먹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울다 지친 나를 보고는 놀라 동생 손에 이끌려 병원 응급실에 온 터였다. 동생은 넋이 나간 나를 대신해 약을 받아 챙기고는 신촌의 한 김밥집으로 데려왔다. 김밥 2인분과 떡볶이를 순식간에 먹어치운 후에야 정신이 들었다. 약을 받아 씩씩하게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레 거울로 내 얼굴을 살펴보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그 자리에 그대로 바알갛게 부어오른 상처가 "조심해!"라며 나에게 다시 한번 경고하는 듯했다.
몇 년 전 중남미 여행에서 얻었던 이름 모를 상처는, 지금 추측해보건대 베네수엘라 바닷가에서 먹었던 시푸드가 문제였던 것 같다. 생선 알 같은 게 있었던 것 같기도. 참으로 더운 날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멀쩡했던 걸 보면 내가 원래 그런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에 알지 못했던 병의 원인을 이제야 알다니. 그렇다. 세포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난 잊고 있었지만 세포는 나도 모르게 나를 지킬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때 반응했던 바로 그 위치의 세포들이 붉은 기운을 품어내며. 휴우... 이제 날치알 비빔밥은 먹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저도 날치알 비빔밥 참 좋아하는데요. 이런. @2006 caracas, VENEZUELA
*대문사진은 구글에서 퍼왔습니다. 가물가물한 기억엔 파도가 꽤 높았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