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ufen, TAIWAN
벌써 해는 기울어 어스름해졌다. 마음이 급해졌다. 앞의 일정이 조금씩 더디 진행된 탓이었다. 아 국제 운전면허증이라도 해갖고 올걸. 해안의 도로를 덜컹거리는 버스에 내맡기고 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게 맛이라고, 신나게 들떠 있었으나. 시간에 쫓겨 타이베이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아깝고도 아깝도다. 그래도 저녁 한 끼, 차 한잔 정도 하고 갈 시간은 되었다. 일단 정류소에서 타이베이 가는 막차 시간을 알아보았다. 우리 남은 시간을 초 단위로 쓰자며 지우펀 수치로 골목을 들어서니 벌써 문을 닫고 있는 상점들이 하나 둘 있었다.
"일단 밥 먹자!"
아침에 온천, 단수이에서 춘장이 든 비빔면을 먹고 예류 한 바퀴 돌고 동동거리는 버스를 갈아 타 겨우 도착한 지우펀이었다. 무슨 유명한 영화에 나왔다고 하지만 그건 잘 모르겠고, 단지 홍등이 가득한 사진에 반해 이번 여행에 꼭 넣었던 터다. 지우펀에 와서 차 세트를 시켜 우아하게 마시리라. 하지만 그전에 밥부터 먹어야겠다. 허기에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하나 둘 어두워지는 골목에서 우리는 운이 좋게도 단번에 식당을 찾았다. 높은 언덕에 켜켜이 쌓여 있는 목조 건물에서 타이베이와는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바다일 것이다. 건물들의 붉은빛이 해안선의 실루엣을 밝혀준다. 조금 일찍 왔더라면 더 좋았을 걸.. 후회해도 소용없다. 대신 우린 예류에서 좀 더 시간을 보냈잖아? 다음에 다시 오자. 서로 위로하며 늦은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이곳에서는 정말 실패한 식당이 없다. 다 맛있게 먹었다. 미식가가 아닌 나도 대만에 살고 싶을 정도다.
맛있게 저녁을 먹고 나니 막차로부터 약 1시간 여가 남았다. 홍등이 걸려 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놀랍게도 탄광 입구가 나왔다. 맞다. 이곳은 폐광으로 유명한 동네다. 시간이 얼마 없음을 누군가 아셨는지 우리를 단번에 인도하신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찻집 몇 개가 눈에 띄었다. 우리는 한 찻집에 들어갔다. 약 50여 분 여유가 있었다. 종업원은 친절하게 차의 종류를 설명해 주었다. 아.. 시간이 없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는 몇십 초간의 갈등 후에 결국 우롱차 세트를 시키고 말았다.
종업원은 친절하게 차를 우리는 법부터 알려 주었다. 차는 시간을 두고 어느 정도 우려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차를 제조하는 과정 역시 찻잎을 따고, 수 밤을 정성스레 말리고 씻어 만드는 것. 자연의 잉태, 그리고 사람의 정성과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좋은 차를 만들 수 있지 않던가. 급하게 시간에 쫓기는 여행자들이 누리는 사치랄까. 차를 우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조급한 마음을 자연스레 내려놓게 되었다.
다도(茶道), 혹은 차예라 불리는 차를 마시는 예절.
그 단계를 조금 살펴보자면,
1. 작은 찻주전자 1/4에 우롱차를 넣고 첫 물을 넣은 뒤 따라 버린다.
2. 찻잔을 덥히기 위해 두 개의 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두 번째 물을 넣은 찻주전자 위에 붓는다.
3. '긴 잔'에 차를 따르고 바로 '넓은 잔'을 엎은 후 거꾸로 놓는다.
4. '긴 잔'을 들어 향기를 맡은 후 '넓은 잔'에 있는 차를 즐긴다.
우리는 어쩐지 편안해진 마음이 들었다. 그래,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제대로 된 차를 즐겨볼까.
종업원이 알려 준 대로 찬찬히 '긴 찻잔'을 들어 향기를 맡았는데, 세상에나. 이런 향이 또 어디 있을까? 한국에선 그저 머그잔에 티백 띄워 마시는 물 정도로만 생각했다. 커피와는 달리 차 향은 쉽게 날아가 제대로 맡을 겨를이 없는데 이렇게 차 향기를 모아 맡으니 아찔할 정도로 치명적인 향이었다. 매혹적인 차향은 숨을 채 두 번 들이쉬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대만 사람들은 차 향을 이렇게 맡을 생각을 했을까. 찻잔의 모양이 다른 두 개를 포개어 하나의 찻잔에 향을 담고 다른 찻잔에 찻물을 담는다. 친구와 함께 고즈넉하게 창 밖을 바라보며 차 한잔 하니 시가 절로 나온다. 아아. 풍류가 이렇게 나오는 것이 로고.
차는 흔히 5감을 충족시킨다고 한다. 찻잔에 차 따르는 소리에, 찻잔을 들어 향기를 맡고, 찻잔의 따뜻함을 느끼며, 오묘하게 우러난 차 색깔을 바라보고, 맛을 음미하면 비로소 오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감각의 확장. 차 문화는 물론 서양에도 있지만 다도라 할 만 큼 동양의 사상을 담아낸다. 차는 인간의 욕구(식욕)를 해결하는데서 넘어 명상과 사색을 가질 수 있으며, 벗과 차를 나누며 관계를 돈독히 하기도 한다. 때론 인체의 독소를 빼주고 순환을 좋게 하기도 한다. 차는 인간이 발명한 최고의 사치이자 철학이다. 나는 평소 차를 홀짝홀짝 마시기에만 급급했지 차를 우리고 찻잔을 따뜻하게 덥히고, 향기를 담아 마시는 정성스러운 단계를 소중하게 생각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다도(茶道)라 하는 것이겠지. 여행지에서 이런 소소한 삶의 가치를 일깨우는 순간이 참 고맙다.
막차시간이 다 되어 우리는 아쉽게도 찻집을 나왔다. 하지만 이거면 되었다. 아까와 같이 갈 시간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전처럼 조급하지 않았다. 이건 마치 우리가 우리 스스로 갖고 있던 시간의 간격을 주욱 늘여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분명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50여분이었지만 차를 우리면서, 기다리며 나눈 너와의 대화, 그리고 입안을 감돌던 따뜻하고도 농염한 향내가 몇 시간을 밀도 있게 보낸 것보다 더 진했다. 모든 사람들이 하루에 같은 시간을 사용하고 있지만, 나는 1분 1초 그 사이사이가 멀찍이 떨어진 느낌. 여유. 그대 이제 나와 함께 차를 우리는 정성을 더해 차 한잔 합시다. 인스턴트커피 말고.
@2011 jiufen, TAIW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