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R은 폼이 아니다
얼마 전 일어난 강원도 산불이 국가재난사태 선포에까지 이르며 어마어마한 피해를 내고 진화됐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예전 회사에서 발생했던 일이 떠올랐다.
사건은 그룹 차원에서 실행하고 있는 글로벌 스포츠 이벤트 현장에서 일어났다.
그룹 계열사 사장님들, 각 사업부문 수장이신 임원분들, 그룹의 임원들은 각 회사, 사업부에서 어렵게 모신 전 세계 주요 고객분들을 만나 함께 경기를 관람하시거나 같이 골프를 치시며 관계를 돈독히 하시는 등 최고위급의 고객관리를 하신다.
그룹 전체 임원들과 전 세계의 다양한 고객사 귀빈들 수백명이 각자 다른 일정과 계획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로지스틱은 행사 성공의 핵심이다. 호텔이나 비행편 어레인지는 껌이다 싶을만큼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조정이 복잡하고 까다로운데다 참석하시는 관련 업계 고객분들은 1년전부터 일정을 조정해서 어렵게 참석을 하시기 때문에 일정이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새라 각 회사 담당자들과 준비 인력들, 대행사 협력인력들은 준비와 마무리 포함한 거의 1주일 이상을 초긴장 상태에서 지낸다.
사건이 일어난 그날 아침도 준비팀 모두 일찍 일어나 사장님과 주요 고객사 회장님 일행을 모 골프장으로 보내드렸다. 출발 전 담당자가 운전기사에게 행선지를 재확인하고 차를 출발시켰는데, 한시간 쯤 있다 상무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사장님 일행이 엉뚱한 골프장에 도착하셨다고 했다.
진돗개 백마리 시츄이에이션이라 급하게 담당자를 찾아서 상황을 확인하고 최대한 빨리 해결하라고 했다. 담당자만이 가장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나는 상황 해결되기 전까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을테니 전권을 가지고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보고하라고 부탁했다.
담당자는 혼이 나가서 이리뛰고 저리뛰며 타고 가신 밴을 계속 쓸 수 있는지-참석자들이 워낙 많다보니 차량 수급이 가장 어렵고 차량 운행일정이 어마어마하게 복잡해서, 혹시 조금이라도 삐긋하면 차가 없어 귀빈들 모시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아니면 일단 본부나 다른 곳으로 차를 보내고 다른 차를 기다려 이용하셔야 하는지 확인해 차량수배를 하고, 원래 가셔야 할 곳에서 발생한 노쇼를 해명하고 티타임을 바꾸는 등등 정신이 하나도 없이 전화와 무전을 동원해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정신없는 와중에 상무님이 거의 십분에 한번씩 전화해서 이 일이 왜 일어났나, 누가 잘 못했나, 어떻게 처리할것인가, 어디까지 처리되고 있는가, 언제 해결 되나, 왜 빨리 전화해서 처리상황 보고를 하지 않느냐...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물어 보신 것이다. 아...
담당자는 몇번 전화를 받다가 도저히 일이 안되니,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전화 못 받겠다, 해결이 먼저니 해결 먼저 하고 설명드리고 사죄하겠노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나 역시 상무님과 통화할 때 담당자가 최선을 다해 해결하고 있으니 기다려 보시자고 몇번 말씀드렸지만 계속 전화를 하다가 담당자에게 그 이야기를 들으신 것 같았다.
어찌어찌 수습해서 사장님 일행은 원래 목적지로 가셨고, 더 이상의 문제는 없이 계획됐던 일정을 진행하셨다.
저녁 즈음 만나 뵈니 화가 좀 풀리셨지만 여전히 어이없고 괘씸해 하시는게 보여 거의 무릎 꿇다시피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사장님 혼자 계실 때 발생한 일이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겨 주실 분인데, 주요 고객분을 모시고 간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망신을 당하신거라 변명도 해명도 필요없는 케이스였다.
일을 해결하고 담당자 얼굴을 보니 핏기가 싹 가신데다 5년은 늙어보였다. 어쨌거나 잘 해결되어 다행이고 수고 많았다고 했는데, 수습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끊임없이 걸려오는 닥달 & 의미없는 보고요청 전화에 미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일단 행선지에 잘 못 가신 건 이미 일어난 일이니 없던 것으로 할 수 없지만, 최대한 빨리 원래 일정을 하시도록 할 수는 있다. 그래서 내가 한발 뒤로 물러나서 담당자의 판단을 믿고 책임과 권한을 준 것을 지금도 잘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끊임없이 전화를 하셨던 그분의 초조함과 불안함은 이해하지만 상황 해결을 지체시킨 걸림돌만 된 점은 많이 아쉽다.
산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미 발생한 불은 어쩔 수가 없다. 빨리 해결책을 찾고, 역량을 집중해야 하고, 그를 위해 담당자에게 판단과 지휘권을 주었기에 그렇게나 크게 번졌지만 인명피해도 거의 없고, 규모대비 비교적 빠른 시간에 진화가 됐다. 물론 담당 최고책임자가 본래의 역할을 하게 되기까지 피치 못하게 붙들려 있었던 점은 여전히 안타깝고 화가 난다.
매년 초, 회사에서는 R&R 시트를 채운다. 업무별, 팀내 역할별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리하는 것이다, 예산 담당은 누구, 그룹 스포츠 이벤트 담당은 누구 등등 촘촘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일하는데 필요한 프로세스, 의사결정권(예산 운영권 포함)까지 다 적기 때문에 올 한해 누가 무슨 업무를 어떻게 할지 보인다.
R&R 시트를 채우라는 업무연락이 오면 다들 또 이거 하냐고 한 숨 쉬는 일이 다반사였다. 형식적 문서작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당장 누가 담당자인지, 책임을 져야 하는지 따지고 그 문서가 증거가 된다.
책임을 묻기 위해서만 이용되니 다들 대충 써 내려고 하는 것이다. 책임을 주었으면 해결할 권한도 함께 주어야 종이에 적고 공유하는 의미가 있다.
담당자, 역할과 책임, 권한 이런 것들은 말로 하고, 문서에 적어 놓는 것이 아니다.
담당자에게 책임과 함께 권한을 주고, 실제 상황에서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align 하는 것이 중요하다. 책임은 권한과 함께 하는 단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