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장마철에 최고 인기 음식 중의 하나는 부침개이다. 비 오는 소리와 부침개를 기름에 부치는 소리가 비슷해서, 빗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부침개가 떠올라서 먹고 싶어 지기 때문이란다. 그럴듯한 분석이다.
내가 어릴 적에도 비 오는 날에 엄마는 부침개를 해주셨다. 비가 오면 밖에 나가 놀지 못하니 집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세 아이가 북적이는 집, 배고픈 아이들의 간식으로 부침개는 가장 빠르고 손쉽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음식이었을 거다. 엄마는 호박과 깻잎, 가지 등 텃밭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따온 온갖 채소를 잔뜩 넣어 부침개를 만들어 주셨다. 채소로 다른 반찬을 만들어 주면 안 먹어도 부침개 속의 호박과 깻잎, 가지는 잘 먹었다. 요즘에야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특별할 것도 없는 채소들이지만, 30여 년 전에는 여름에만 먹을 수 있는 “시즌 리미티드 식품”이었다.
호박 부침개가 초여름 비 오는 날 한국인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추억의 시즌 리미티드 음식이라면, 프랑스인들에게는 “라따뚜이(ratatouille)”가 있다. 라따뚜이 하면 많은 사람들이 쥐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떠올린다. 심지어 라따뚜이가 주인공인 쥐의 이름인 줄로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라따뚜이는 쥐의 이름이 아니라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의 가정식 이름이다. 기억하기 어려운 이국적 명칭에 그럴듯해 보이는 모양새, 게다가 프랑스 요리라고 하니 뭔가 대단한 음식 같지만, 사실 라따뚜이는 흔한 재료를 사용하고 만들기 쉬운 요리다. 30여 년 전에 한국의 엄마들이 텃밭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호박, 가지 등을 따와 부침개를 만들었다면, 프랑스의 엄마들은 호박, 가지, 토마토를 이용해 라따뚜이를 만들었다. 그렇다. 호박, 가지, 토마토가 전부다. 여기에 토마토소스와 올리브유만 있으면 된다. 올리브유가 없다면 다른 식용유를 사용해도 괜찮다.
재료: 호박, 가지, 토마토, 토마토소스, 올리브유, 허브 믹스(없어도 됨)
만드는 법
1. 호박, 가지, 토마토를 0.5-0.7cm 정도 두께로 둥근 단면을 살려서 썬다.
2. 팬에 토마토소스를 자작할 정도로 담는다. 허브 믹스를 넣으면 보다 이국적인 맛을 즐길 수 있다.
3. 2위에 호박 -> 가지 -> 토마토의 순서로 팬의 둥근 모양을 따라 담는다.
4. 채소 위에 올리브 오일을 살짝 바른다.
5. 180도로 예열한 오븐에서 25-30분간 굽는다. 오븐이 없다면 중불에서 20분 정도 익힌다.
빵과 함께 먹으면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된다사실 요리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간단하다. 호박과 가지, 토마토를 일정한 두께로 썰 수만 있다면 요리 초보자라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적은 수고에 비해 그럴듯해 보이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보다 예쁜 색감을 위해 노란색 파프리카와 양파를 추가해도 좋다. 단백질을 보충하고 싶다면 두부를 더하면 된다.
혼자서도 자주 해 먹지만 특히 손님을 초대할 때 매번 만든다. 고기를 넣지 않고도 맛있고, 게다가 포토제닉한 요리라 다들 좋아한다. (요즘은 요리도 사진발을 잘 받아야 한다.) 특히 호박이나 가지를 안 먹는 어린이, 청소년들도 잘 먹는다고 엄마들이 좋아한다. 아이들에게 친숙한 토마토소스로 맛을 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 부침개에 들어간 채소를 맛있게 먹었던 것처럼 프랑스 엄마들도 아이들에게 채소를 먹이려고 만들어 주셨던 건 아닐지...
애니메이션 <라따뚜이>에서 주인공인 쥐(레미)는 요리사다. 레미는 요리사가 갖춰야 할 최고의 미덕인 절대미각과 빠른 손놀림, 무엇보다도 열정을 갖고 있다. 단점은 단 하나, 그가 “쥐”라는 것. 쥐와 요리, 이것만큼 상극인 것이 있을까? 레미도 일찌감치 자아성찰을 마치고 요리사가 되기를 단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수구에서 길을 잃었다가 우연히도 파리의 최고급 레스토랑에 다다른다. 여기서 사람이지만 요리를 못하는 견습생 링귀니를 만나 친구가 되고 둘이서 하나의 요리사가 된다. 즉 사람의 몸인 링귀니가 요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조리과정을 지휘하는 건 링귀니가 쓴 주방 모자 속의 레미다.
(이후 스포일러)
레미와 링귀니는 한 몸이 되어 요리를 하고 그들의 레스토랑은 손님으로 넘쳐난다. 어느 날 소문을 듣고 파리에서 가장 까다로운 요리 비평가가 그들의 레스토랑을 방문한다. 온갖 산해진미는 다 먹어봤을 요리 비평가를 어떤 음식으로 감동시킬 수 있을까? 레미의 선택은 바로 라따뚜이였다. 제정신이냐며 레미의 선택을 반대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레미는 정성을 다해 라따뚜이를 만들었다. 테이블에 올라온 라따뚜이를 본 비평가는 비웃는 듯했지만, 한 입 먹어본 이후 비웃음은 사라졌다. 그가 맛본 라따뚜이는 바로 어릴 적 엄마가 만들어줬던 그 라따뚜이의 맛이었다. 우리로 치면 국내 최고 입맛을 가진 까다로운 한식 비평가이자 미식가에게 호박 된장국이나 채소 부침개를 해 준 셈. 하지만 그 비평가가 친구와 싸우고 우울했다가 엄마의 된장국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 기억이 있다면...? 비 오는 날 동생들과 함께 부침개를 먹으며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있다면...? 어떤 값 비싼 음식보다도 감동을 받지 않을까?
다음날 비평가는 최고의 찬사가 담긴 평론을 발표했다. ‘누구나 요리할 수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믿기지 않는가? 라따뚜이를 만들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누구나 요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