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제(Eze)에서 본드걸을 꿈꾸다
프랑스 남부의 휴양도시 에제(Eze)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생소하지만 프랑스인들에게는 꿈의 휴양도시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니스(Nice)와 모나코(Monaco) 사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한쪽은 지중해이고 다른 한쪽은 언덕 또는 산처럼 높이 솟은 특이하고 아름다운 지형과 풍광으로 유명한 곳이다. 기막힌 풍경 덕에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했다. 특히 해안 절벽 도로를 따라 달리는 위험천만한 추격 장면에 최적이다.
2014년에 직장을 그만둔 뒤에 6개월 정도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여행했다. 원래 계획은 친구가 살고 있는 파리에서 한 달간 지낸 후, 와인으로 유명한 보르도와 프로방스에서 와인을 맘껏 마시다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거였다. 그런데 출국 이틀 전에 운명처럼 에제 지역에서 촬영된 한 여행 프로그램을 보고 그만 에제에 꽂혀버렸다. 지중해를 멋지게 내려다보는 샤토 에자(Chateau Eza) 호텔은 하룻밤 숙박비만 100만 원에 이를 정도로 큰 금액이었지만 내게는 퇴직금과 조기 퇴직 위로금이 있었다. 빠른 결정에 감사하는 특별 여행금까지 받았던 터라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꼭 머무르고 싶었다. 내게 한 달간 거실을 내어 준 친구에게 선물도 할 겸 같이 가기로 했는데... 아쉽게도 출발 이틀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은 친구가 미국의 집으로 갔고 에제는 나 혼자 가야 했다. 여행 경비가 넉넉하다고는 해도 혼자서 하루에 백만 원을 숙박비에 쓰며 이틀간 지내기는 좀 부담스러웠다. 혼자서 움직이니 여행 일정에도 여유가 생겼다. 조금 싼 숙소를 구하고 대신 에제에서 1주일간 머무르기로 했다. 에어비앤비와 호텔 예약 사이트 여러 개를 몇 날 며칠간 검색한 끝에 맘에 꼭 드는 곳을 찾았다. 에제 호텔과는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 조금 낮은 곳에 있지만 도로와 가깝고 그만큼 해변과도 가까운 곳이었다. 테라스에서 보이는 지중해의 풍광도 훌륭했다. 그곳에서 머물며 매일 브런치를 샤토 에자에서 먹는 걸로 계획을 수정했다.
며칠 후 도착한 숙소는 화면 속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멋졌다. 주인 미리암(Miriam)은 파리지엔느처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웃음과 정이 넘치는 프랑스 아줌마였다. 이곳에서의 1주일이 정말 기대되었는데... 사실 나는 에제에 오기 전에 머물던 아비뇽의 싸구려 숙소에서 침대 빈대(bedbug)에 잔뜩 물려왔다. 팔과 다리와 몸통 그리고 얼굴에도 몇 군데 물렸다. 오른팔에 물린 곳을 이백 개 정도 세다가 말았다. 특히 손목과 팔뚝에 집중적으로 물린 탓에 더운 날씨에도 긴 팔을 입고 다녔다. 하루 이틀 가렵다 말겠지 했는데 에제에 머무는 내내 괴로웠다. 낮에는 억지로 참았지만 밤에는 자는 중에 긁다가 물집이 잡히고 피가 나기도 했다. 밖에 나갈 엄두도 못 내고 자쿠지에 들어앉아 찬물과 얼음으로 마사지를 하면서 가려움을 가라앉혔다. 여기까지 와서 집에만 있다니... 샤토 에자에 가서 저녁도 먹고 지중해에서 수영도 해야 되는데... 너무 아쉬웠지만 가려움을 가라앉히는 게 먼저였다. 계속 가려움이 지속되고 물집이 가라앉지 않으면 여행을 완전히 중단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일주일간의 얼음찜질 덕에 물집은 어느 정도 아물었다. 가려움은 그 후로도 한 달 정도 지속되었지만...
운명처럼 다가왔던 에제에서는 자쿠지에서 얼음 마사지를 한 기억만 남게 되었다. 그나마 자쿠지에서 바라본 지중해가 너무 멋졌다는 것만이 위안으로 남아있다. 이별을 아쉬워하는 미리암에게 나중에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며 에제를 떠나 베니스로 향했다.
나는 드디어 지난 10년간 꿈이었던 에제에 다시 왔다. 이번에는 꼭 샤토 에자 (Chateau Eza) 호텔에 한 달간 머물며 매일 아침 레스토랑의 조식을 즐겨야지! 그런데 인사나 하려고 연락했던 미리암이 에제에 오면 꼭 본인의 집에서 지내야 한다고 난리였다. 샤토 에자 호텔보다 더 높은 곳에 새로 집을 지었는데 훨씬 좋은 지중해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겠다 싶어 미리암의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대신에 샤토 에자 호텔은 매일 브런치를 먹으러 가야겠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영화에서처럼 니스에서 모나코까지의 절벽 해안을 페라리로 드라이브한 후 몬테카를로 호텔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거다. 10년 전 나의 버킷 리스트에는 피어스 브로스넌과 함께 본드 걸처럼 모나코까지 해안 도로를 드라이브하는 것이 있었지만, 제임스 본드는 며칠 전 칸느에서 본 걸로 만족해야겠다. 브런치를 먹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어느덧 니스에서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다. 서둘러야겠다.
요트에서 내리는 친구는 구릿빛으로 선탠 한 아름다운 모습이다. 누가 저 여인을 50대로 볼까?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요트에서 아들 뻘 되는 멋진 청년이 등에 선크림 바르는 걸 도와줬다며 즐거워한다. 참 쉰이 넘도록 변치 않는 모습이다. 미리 예약한 페라리를 픽업하고 해안 도로에 들어서니 저절로 본드 걸과 그레이스 켈리가 된 기분이었다. 비싼 차라 조심해서 몰아야 한다고 이것저것 주의사항을 들었지만 하나도 생각이 안 났다. 그저 오른쪽으로 보이는 지중해가 눈 부시게 아름다울 뿐이었다.
몬테카를로에서는 저녁을 먹기 전에 잠깐 룰렛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한쪽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이 아무래도 피어스 브로스넌 같다. 어떻게 말을 걸어볼까 기웃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환호성이 들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내가 베팅한 번호가 5,000유로를 땄다고 했다. 기대했던 잭팟은 아니지만 오늘 저녁을 즐기기에는 충분한 금액이다. 먼저 제임스 본드에게 마티니 한 잔을 보낸 후 나머지는 유니세프로 보내야겠다.
그렇게 마음먹고 마티니를 홀짝이는데 이번에는 어디선가 신나는 음악이 들려온다. 자주 들어본 듯 익숙한 음악이다.
“어서 일어나~, 지각할 거야~~” 아 꿈이었구나.
지금은 비록 꿈이지만 10년 내에 꼭 이루고 싶은 나의 미래의 한 장면이다.
그림 출처: https://www.telegraph.co.uk/travel/destinations/europe/france/cote-d-azur/hotels/chatea-eza-hot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