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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SR Jun 25. 2024

어쩌면 사실은

서른즈음에 자살하기 전 #030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그 영화가 한 명을 바보로 만들어 모두의 웃음거리가 된 영화 줄거리를 안다. 나는 어쩌면 내 인생이 '트루먼 쇼'이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스스로만 모른 채 주변 사람들에 의해 사생활 관찰 예능 주인공 취급 당하는 걸 보고 혹시 나도 그러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그럴 일 없겠지만은 그때는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세상 모든 것이 나를 속이고 있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잊어버렸지만. 나는 왜 잘 풀리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왜 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만족을 느끼지 못할까? 왜? 나만? 늦게 온 사춘기였을까? 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았기에 잠시 머물러 있었던 답변이었다.


나의 관계는 한정적이었다. 고등학교 친구 몇 명, 소수로만 다녔던 학과 동기들, 그리고 결국 같은 학번만 남게 된 동아리 사람들 뿐이었다. 나는 주변에 사람이 많다고 느낄 수는 있었지만, 안정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시절에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결코 풀리지 않는 우울함과 고립감을. 그리고 내 편은 아무도 없다는 고독을.


 나는 여기서 방어적인 삶의 태도를 배우고 말았다. 모든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새로운 사람들을 대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친해질 수 있다가도, 본질을 알수록 나를 떠날 사람들. 어차피 나는 버림받을 존재니까. 가볍게 만나고, 헤어질 수 있는 태도는 잠시간은 좋았지만, 이런 태도는 오히려 나를 더 외롭게 했다.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모든 사람들은 나를 버릴 것이고 나는 결국 홀로 부유하게 될 것이니까. 그래. 역설적으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취했던 태도는 나를 더 가두고 말았다. 나는 나의 마음을, 약점을, 고민을 나누기가 더 힘들어졌다. 드디어 나는 나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나는 이제 나의 순간적인 감정을 공유할 수 없다.


애매한 관계는 괜찮다. 어쩌면 가장 좋은 관계다. 한두 발자국 정도 떨어진 관계는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깊은 대화는 정말 가끔씩만, 그리고 순간만. 농담과 적당한 일상 대화가 주가 되는 가벼운 관계는 감정을 환기시키기에 좋았다. 진지하게 깊게 파고들면 나는 말이 없고 침묵이 길어지는, 너무나 답답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이런 나는 철저히 숨겨야 했다. 한동안은 이런 생각, 이런 관계로도 충분히 만족할 삶을 살 수 있었다. 적당한 농담, 일상 대화 그리고 정말 가끔 깊고 답이 있는 대화는 자신 있었고 이 정도만으로도 친해질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사회에서 만난 인연들은 그 이상의 관계를 원하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건 그 이상의 깊은 관계를 시작하고 싶을 때였다.


깊은 관계는 내게 너무나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가벼운 건 좋지만, 때때로 몇몇 사람들에게는 더 깊은 관계를 원할 때가 있었다. 그때가 고비였다. 거기서 멈춰야 하지만 나는 바보 같게도 꼭 한걸음 더 나아가고 후회했다. 절벽인지 모르고. 깊어지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고, 한마디 하고 그 한마디를 한 나를 되돌아보는 그런 피곤한 길이었다. 그리고 나는 깊은 관계를 지속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을 숨기고, 가능하면 타인에게 맞춰주고,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태도는 절대 좋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깊어질 뻔한 사람들은 쉽게 나를 떠났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사실은 내가 나쁜 사람이었기에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한두 번이라면 상대를 탓할 수 있겠지만, 반복된다면 나의 탓이니까. 돌아본다는 건 의심을 가지는 것이고 그건 나를 또 혼란으로 빠뜨린다. 나는 선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모르는 나의 요소들은 악이 아니었을까? 나의 기준은 완벽하게 뒤틀렸던 것일까? 내가 '트루먼 쇼'라고 느꼈던 것은 잘못된 나의 대한 방어기제가 아니었을까?


어른이 되면 나는 소위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어디서나 당당할 수 있고 자신감 있고,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 않는 그런 어른 말이다. 하지만 그건 부단히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화된 인간이었다. 직장에서 당당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하고, 사적인 만남에서 당당하려면 나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 했다. 돌아보니 내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왜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고 생각했을까? 부단히 얻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는데 이게 없다면 아무것도,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걸 왜 늦게 알아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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