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구마 Sep 27. 2021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리처드 도킨스, 『신, 만들어진 위험』(김영사, 2021)

종교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말하기 전, 종교를 보는 나의 감정을 풀어 놓는 게 먼저겠다. 나는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이었다.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자연스레 유년시절 기독교는 내 삶의 거의 전부가 되었다.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사랑이었고, 살아있었다. 그 시절 교회는 내게 같은 신을 섬기는 따뜻한 사람의 공동체였다. 매주 그곳에서 따뜻한 어른들의 사랑 속에 또래 친구들과 뛰어놀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람의 차가움이 드러났다. 고등학생이 될 무렵, 목회자의 방향성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던 우리 가족은 미운털이 박혔고, ‘광야’로 쫓겨나듯 평생 헌신했던 교회를 떠나야 했다. 그 사건은 내게 큰 상처가 되었다. 이후 나는 교회를 떠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 애썼다. 하지만 어린 소년에게 주입된 종교적 가치관은 성인이 된 오늘까지도 내게 영향을 주고 있으며, 종교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계속 되는 중이다. 그리고 『만들어진 신』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의 신간을 읽는다.

 위대한 생물학자로 칭송받는 도킨스는 범세계적 이익집단이 된 종교의 영향력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 신의 존재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시각마저도 거절한다. 신과의 타협보다 대결을 택한 그는 단언한다.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수많은 신 중 “믿지 않을 신은 너무나 많다”(15쪽)고.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은 없다고. 두 가지 영역을 넘나들면 전개하는 그의 확정적 단언은 단연 거칠고, 다소 공격적이며, 다분히 논리적이다.


역사-신뢰성의 영역, “증거로서 불충분하다.”(29)     


과학자는 가설을 세우고 검증한다. 가설이 상상력을 기반으로 쌓아 올리는 일종의 ‘창작’ 작업이라면, 검증은 모순 없는 가설을 제외한 나머지를 무너뜨리는 ‘붕괴’ 작업이다. 검증을 거쳐 살아남은 가설만이 사실로 인정받는다. 역사가의 작업도 이와 비슷해서 인류가 쓴 역사도 참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한 검증 과정이 불가피하다. 물론 ‘증거 없음’이 거짓의 증거는 아니지만, 증거로 제시하는 것들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도킨슨은 종교(이 책에선 주로 성경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를 일컫는다)는 검증이 되지 않은, 혹은 오류투성이의 가설에 불가하며, 따라서 유대인의 역사인 성경은 ‘창작’의 영역에서 머문다고 꼬집는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이 그렇다.    


예수의 죽음과 복음서들이 쓰인 시점 사이에 긴 공백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그 복음서들이 과연 역사의 믿을 만한 길잡이인지를 의심할 한 가지 이유를 제공한다. 또 하나의 이유는 복음서들이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 복음서와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 불일치하는 부분도 있다. p.44~45      


신자들의 믿음은 그들의 교리가 불가항력적인 ‘사실’이라는 확신에 기반을 두므로 도킨슨의 이러한 지적은 날카롭고 치명적이다. 성경은 완전무결한 사실이라는 신학자의 주장보다 성경이 구전되는 와중에 와전되었고, 또한 전승되는 과정에서 각색되었다는 과학자의 주장이 오히려 믿음직하다. 도킨슨의 가설-검증의 논리는 반박이 어렵다. 이러한 논리 앞에서 100세에 얻은 귀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내린다거나, 자신을 섬기지 않는 이민족에 대한 처참한 살육을 지시하던 폭력적인 신의 윤리성에 대한 의심, 즉 종교가 인류에 미치는 ‘선’에 대한 논의마저 뒤로 밀려난다.

 종교적 교리, 즉 신이 부여한 원칙에 입각한 ‘선함’의 기준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부당함이 되어버린 경우를 자주 찾을 수 있다. 결혼한 여성은 남편의 허락 없이 은행 계좌도 개설할 수 없는 이슬람의 교리는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이 될 수 없으며, ‘우상을 섬긴다면 삼대를 멸하리라’는 신의 질투는 우리에게 어떠한 선한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 도킨슨은 단호하게 말한다.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종교가 필요하다는 믿음”(186쪽)은 시대착오적이며, 종교의 힘을 빌려서라도 ‘선’을 추구하려는 인류의 경향 역시도 과학이 설명해준다고.

       

과학-정확성의 영역, “설계자는 없었다.”(224)     


우주의 신비를 파헤치는 천문학, 물질과 에너지의 법칙을 다루는 물리학 등 과학 분야에 깊게 몰두했던 이들이 오히려 종교에 귀의하게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한다. 현미경을 들여다보거나 수십 개의 방정식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수식을 풀며 그들은 이렇게 감탄했으리라. ‘이토록 아름답고 완벽한 질서라니!’ 그 감탄은 감동이 되어 결국 ‘완벽한 질서를 구상한 설계자, 즉 신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겠다.

 물론 거대한 우주의 먼지 속에서 사피엔스라는 종이 탄생할 확률처럼 도저히 우연으로라도 “있을 법하지 않은”(223쪽) 일들이 있다. 그런 신비로움 앞에 인간은 무력해지고, 신은 강해진다. 하지만 철저한 이성의 과학자인 도킨슨은 섣부른 감탄을 애초에 도려낸다. 어떤 절대적 창조자가 만들어냈을 법한 일들, 특히 위대한 생명체의 신비는 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 그 대표적인 예가 다윈의 진화론 ―우연히 생존에 유리하도록 작은 변화를 이룬 것들이 살아남았다는 이론―이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게 무엇이든 그것은 한 번에 생겨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과 조금 다른 어떤 것에서 생겨났다. 매 단계 아주 작은 변화만을 일으키는 아주 작은 단계를 밟아 점진적으로 슬며시 생겼다고 생각하면 있을 법하지 않음의 문제는 저절로 풀린다. p.240     


육체적 진화뿐 아니라 우리에게 이타심, 친절, 배려 같은 윤리적 개념이 생긴 것도 진화론적 시각, 즉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 도킨슨의 이론이다. 그는 타인에게 베푸는 친절함이 단지 생존과 번식(즉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 이행) 확률을 높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선함’마저도 신이 아닌 생물학적 유전자의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도킨슨도 과학이 아직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가득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약 40억 년 전에 진화 과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아직은―모른다”(341쪽)와 같은 문장은 씁쓸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다. 여전히 종교적 환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과학적 무지의 영역에 대한 그의 인정은 인류가 “다윈과 갈릴레오, 베게너의 지적 용기”(341쪽)를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 지적 세계 더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자, 이성의 영역에서 더 정확해질 수 있다는 확신에 가깝다.      


신을 찾는 인간, 신이 찾는 시대     


종교는 내게 신을 따르고 싶도록 만들었던 따뜻한 추억이자,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들었던 서늘한 악몽이다. 그런 양가감정은 종교에 대한 나의 판단을 오래도록 따라다녔다. 삶이 위태로운 인간에겐 신의 존재가 간절하다. 종교조차 없다면 마음이 무너져버릴 것 같은 때에 종교는 과학보다 현실적인 희망이다. 절망 속에서 간절히 찾는 인간에게 희망으로 응답하는 신은 존재해 마땅하다.   

 종교가 말하는 보편적 사랑과 윤리는 속세에도 유효하다. 그러나 많은 종교―집단이 말하는 사랑은 변질됐고 이상은 오염됐다. ‘신의 뜻’이라는 명분 아래 사람이 죽고 사람을 죽이는 종교는 철저한 거짓이며 시대적 과오다. 거짓에 이용당하는 신이야말로 인간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위험”이다. 그런 거짓된 신이 오늘날 이 땅의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만연하다. 만약 진정한 신이 존재한다면 지금은 그 신의 아름다운 조율이 필요한, 신이 찾아야 하는 아픈 시대다.

 도킨스는 이번 책에서 종교가 포장하고 덮어둔 이면의 서늘한 영역을 날카로운 지성과 이성의 논리로 해체하는 데 힘쓴다. 종교의 힘과 품위가 바닥에 떨어진 요즘 시대에 그의 작업은 거의 성공에 다다른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책은 내게 시원섭섭하면서 달고도 씁쓸하다. 종교는 여전히 내게 아픈 손가락이다.      


그리고 만약 종교든 이성이든, 어딘가에 진리의 존재가 계신다면, 우리를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