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 <마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명제에 대하여 우리는 곧잘 과학의 논리를 동원한다. 인류가 축적한 지식의 총체라고 믿는 과학의 힘을 빌린다면 우리는 어떤 영역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테지만, 그 대답이 언제나 썩 명쾌한 것은 아니다. 사실에 가까우나 진실엔 닿지 못하는, 감성이 배재된 불확실한 대답은 논란의 불씨를 당기고, 불화를 부추긴다. 예컨대 인류의 오래된 질문인 ‘모성(母性)’ 같은 것이 그렇다.
20세기 최고의 문제작(물론 여기서 ‘문제’란 trouble이 아닌 question, 인류를 향한 존재론적 질문에 가깝다.) 『이기적 유전자』의 과학적 논리에 따른다면 모성애는 생존을 위한 유전자의 명령이 암컷 개체를 통해 발현된 것일 테지만, 그렇게 성급하게 결론내기엔 그것이 삶에서 보여주는 광경은 너무 힘겹고 동시에 고귀하다. 이토록 불가해한 명제는 이야기의 힘을 빌릴 때 비로소 진실해질 것. 영화 매체에 기댄 이야기의 힘으로 우리는 모성에 대하여, 그리고 엄마에 대하여 말해볼 수 있다.
린 램지의 <케빈에 대하여>(이하 <케빈>)와 봉준호의 <마더>를 본다.
자유로운 축제의 현장 한가운데 있는 자신을 추억하던 에바(틸다 스윈튼)는 으깨진 토마토처럼 붉게 물든 집에서 깨어난다. 물건이 널브러지고 페인트가 흩뿌려진 집은 철저히 망가진 에바의 삶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회상 속 지난날의 그녀에게는 자유가 있었고, 꿈이 있었고, 가족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현재. 생계를 이어가려는 에바의 노력은 그녀의 지난 삶이 어땠는지에 대한 기억의 파편과 함께 한결 비참해진다. 좋았던 모든 것들은 있‘었’으므로(그리고 지금은 없으므로), 그녀의 비참한 오늘은 모든 것을 앗아간 어떤 과거에 기인했을 테다. 그녀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존재는 그녀의 아들 케빈(에즈라 밀러)이다.
에바와 프랭클린(존 C. 라일리)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겨난다. 계획에 없던 에바의 임신에 대하여 그녀의 남편의 흥분된 반응과 (“우리가 해냈어.”) 에바의 흔들리는 눈빛은 극명하게 갈린다. 자유로운 삶을 꿈꾸던 에바는 아들 케빈을 가지게 된 후 엄마로서의 인생을 배워가지만, 온전한 사랑―모성애를 습득하는 데는 애를 먹는다. 출산 후 울고 있는 케빈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병원 침대에 무감하게 앉아 있는 에바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던 모성애의 과학적 설명―유전자의 명령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실수로 유전자의 절반을 나누게 된 그날 밤을 후회한다.
모성의 자연습득에 실패한 에바는 그 빈자리를 노력으로 채우려 한다. 그러나 에바의 불완전한 모성은 여전히 위태로웠고, 극도로 예민한 성정을 타고난 케빈에게 에바의 위태로운 모성은 불충분하다. 엄마가 가슴을 내어주지 않은 채 팔만 뻗어 자신을 잡아 올렸을 때 아이가 느끼는 감정은 차라리 공포감이었을 것. 유아기 시절 엄마와의 유대에서 안정감을 얻지 못한 케빈은 성장하면서 에바를 향한 노골적 적대와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에바는 모성애 대신 부모라는 책임감을 통해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케빈을 가까스로 버텨내지만 (에바를, 그리고 어쩌면 스스로를 향한) 케빈의 증오는 점차 짙어지고, 결국 끔찍한 방식을 통해 가정의 바깥으로 터져나간다.
감독 린 램지는 여러 차례의 플래시백을 통해 극단적인 케빈의 만행이 드러나는 순간을 보여주면서 모성의 책임 소재를 질문에 부친다. 과연 케빈의 잔혹한 범죄는 누구의 탓인가. 끔찍하게 철저한 악마가 되어 계획된 범죄를 실행한 케빈 자신의 탓인가, 혹은 그런 케빈을 낳아 악마처럼 길러버린 에바의 탓인가. 모성 습득의 실패는, 스스로 인간성을 버리는 잔혹한 행위만큼이나, 거대한 윤리적 잘못인가. 자식에 대한 모성의 책임의 무조건적 강요는 폭력이다. 그러나 케빈이 수감된 후에도 에바의 삶에 가해지는 구조적 폭력은, 어지럽게도, 실패한 모성을 대하는 우리의 흔한 일차적 반응이자 대답이다.
<케빈> 속 에바가 모성 습득에 실패한 엄마였다면, 봉준호의 영화 <마더> 속 ‘엄마’(김혜자)는 모성 통제에 실패한 엄마로 그려진다. 극중 이름조차 없이 누구에게나 ‘엄마’로만 불리는 이 인물은 자신의 손가락이 베여도 아랑곳없이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지독한 모성애의 화신이다. 지능이 낮은 그녀의 아들 도준(원빈)은 에바를 증오하는 케빈과 정반대의 인물로, 성인이 되어서도 오로지 엄마를 의지하며 유아기적 구애의 몸짓(함께 자면서 엄마의 가슴을 만지는 등)을 서슴지 않는다.
과학―생물학의 층위의 논리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모성의 문학―윤리학 층위의 진실을 도출하기 위해 <마더>는 기꺼이 모성의 실험실이 꾸린다. 극한 상황 속 모성의 응답을 관찰하기 위하여 영화는 일단 아들 도준에게 사건을 던져둔다. 여고생 살해 사건 현장에서 도준의 물건이 발견되어 도준이 유력 용의자가 된 것. 자신의 무고함을 논리적으로 방어할 지적 능력이 부족한 도준은 형사들의 강압적 수사에 의해 죄를 인정하게 된다. 도준이 억울하게 수감되자 엄마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그러니까 그녀의 돈과 시간, 그리고 도덕률마저도 내던진다.
돈(에너지)과 시간 같은 물리적 자원의 희생은 양육하는 모든 생명체의 필연이자 본능이지만, 도덕의 희생은 오로지 인간―모성만의 것이다. 자식을 위해 종의 본능과 집단의 규칙마저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인간 엄마에게만 주어진 능력이다. 물론 <마더> 속 엄마의 처절한 희생은 더욱 극단적 사례가 되는데, 이는 엄마가 그녀의 아들 도준에게 큰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일 테다. 과거에 생활고를 이유로 어린 도준에게 농약을 먹여 함께 죽으려고 했던 것. <마더>의 엄마 역시도 유전자의 명령―후손을 통해 유전자를 생존하고 번성케 하라―을 거슬렀던 존재였으므로, 그녀에게 내려진 처벌은 가혹하다.
<마더>의 엄마 역시 이상적 모성의 자연습득에 실패했으나, 그 실패를 통해 처절한 모성을 익혔으므로, 그녀의 모성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도준을 둘러싼 모든 진실이 드러나며 모성은 광기로 변해가고, 광기가 된 모성은 결국 아들을 지켜낸다. 도준을 대신해 누명을 쓰고 수감된 종팔(김홍집)과의 면회에서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엄마 없어?”) 한 개인의 도덕적 반성이자, 모성의 존재 유무로 승부가 갈린 지난한 싸움의 우울한 승전보처럼 보인다. 거대한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지켜내는데 성공한 처절한 모성은 다시, 춤을 춘다.
생물학의 관점에서 모성은 유전자의 자기보존적 명령에 입각한 상식적 행동이지만, 인간적인 관점에서 모성은 비상식적 행동가능성이다. 모성은 타인(자식)에 대한 희생이라는 점에서 한 개인의 처절한 선함이고, 자기 자신(혹은 자식이 아닌 타인)에 대한 파괴라는 점에서 복잡한 해악이다.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에서, 완전한 선도 완벽한 악도 아닌 이타성의 애매한 세계에서, 모성은 이야기에 힘입어 입체적으로 광란한다.
한 영화는 엄마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된 엄마를 심판했고(<케빈>), 다른 한 영화는 엄마이므로 가해자가 된 엄마를 실험했다.(<마더>) 각각 모성의 실패와 성공을 다룬 두 영화는 너무도 다르지만, 그토록 다른 이야기를 통해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너의 허락 없이) 너를 낳았다. 그러므로 태어난 너에 대하여, 나는 일단 유죄다.’ 영화적 윤리학의 관점에서 모성은 언제나 죄가 된다는 것. 최선이 최선을 부르지 못하고 되레 최악을 산출했을 때, 모성은 너무 막막하다. 모성은 축복이자 근원적 죄책감을 떠안아야 하는 가혹한 형벌이므로, 그것의 진실에 대하여, 우리는 말을 아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