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말, <행복회로 부수는 중>(2023)
나의 작은 노트북에는 CD롬이 없다는 핑계로, 앨범을 받고도 한참을 미뤄둔 감상의 시간을 따로 챙겨본다. 앨범이라는 개념이 스트리밍의 연속 듣기 목록이라는 간편한 묶음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다. 좋은 음악을 듣기 위해 앨범 발매일을 기다리고, 매장에서 앨범을 구입하는 게 평범했던(normal) 시절이 지나갔다. 이제 음악을 듣기 위해 CD롬이 탑재된 노트북을 빌리고 별도의 시간을 떼놓는 일은, 말하자면, 굳이 혹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 되었다. 음악을 듣기 위해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생소하고 반가워서, 이 평범하지 않은(not normal)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한다.
나노말의 정규앨범 <행복회로 부수는 중>을 듣는다.
어떤 분야에서건 첫 번째는 막을 여는 중대한 책임일 것. 밴드 나노말은 그 엄중한 임무를 <우주미아>에게 맡긴다. 익숙한 전자음이 1번 트랙의 막을 열면 통통 튀면서도 몽환적인 멜로디가 곡을 이어받는다. 적막하고 어두운 고요보다는 별의 모임에 가까운 맑은 우주를 배경으로 부유하는 것만 같은 음악이 흐르면 CD롬을 찾던 수고가 중력을 거슬러 함께 떠내려간다.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쉽고 편한 방식으로 작업한 결과물이 무려 ‘미아’에 대한 곡이라는 것에서 이 밴드의 향기가 짙게 새어나온다.
하나둘 트랙이 지나간다. 특색 있는 보컬, 친숙하지만 흔하지 않은 멜로디, 공들여 쌓은 듯 절묘한 사운드. 나노말이 만든 동화 같은 작은 세계 속을 둘러보는 느낌이 난해하거나 불쾌하지 않다. 음악에 대한 견문이 좁고 호와 불호가 확실한 리스너로서의 나조차도 무장해제 시키는 음악들. 서정과 발랄함을 넘나들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음악과 밴드는 어느 때건 존중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한다. 하나둘, 트랙은 계속 지나간다.
취향, 선호, 선택의 시대는 앨범의 흐름을 끊거나 되돌리는 데 주저함 없게 만든다. 뮤지션의 의도가 담긴 앨범의 시퀀스를 존중하기로 결심했던 나는 결국 어느 곡 앞에서 멈췄다가 돌아가고 말았다. 그것은 익숙함에 대한 반가움이자 아름다움에 대한 끌림이었다. 하얗고 파란 냉기에 묻힌 것처럼 차가운 나는 그대라는 온기를 기다린다는 말. 8번 트랙 <냉동실>은 익숙한 밴드 사운드에 자기고백을 섞은 후 막연한 기대까지 동시에 품는다. 이 노래는 얼고 녹기를 반복하는 우리의 사랑과 아름답게 닮은꼴이다.
나노말이 남긴 모든 트랙을 거닐고 난 후 인터뷰를 찬찬히 읽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 밥 먹는 것처럼 음악을 해요. ‘당연히 하는 것’이 된 거죠. (…)
음악을 하면 힘들긴 하겠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네요.
- 아트인사이트 인터뷰 중에서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부지런하고, 솔직하고, “밥 먹는 것처럼” 당연한 음악. 그들은 그런 음악을 계속 하기 위해 그런 음악을 계속 했다. 이런 동어반복은 충분히 건강하기에, 밴드의 새 이름 나노말의 어원이자 지향점인 ‘낫 노멀(not normal)’이 민망하지 않다. 평범한 마음으로 비범한 음악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음악 색깔을 바꾸겠다는 과감한 결단을 품고 그간 동어반복으로 유지하며 돌려왔던 그들의 ‘행복회로’마저 ‘부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용감한 밴드를 만났다. 지구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슬프고 힘겨운 일이지만, 정해진 방향이 없는 광막한 우주에서 표류하는 일은 매 순간이 신선한 재미가 될 수도 있을 것. 음악을 배경으로 부유하고 표류하면서 기꺼이 ‘우주미아’가 된 나노말의 음악에 탑승한 일은 중력을 거스르는 짜릿한 경험이었다.
원문: 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3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