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수, 『삶이라는 고통』(북하우스, 2023)
조금은 뻔한 말이다. 삶은 고통이라는 것. 나름의 삶을 살아본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일 테다.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는 일, 늦은 저녁 지하철에 몸을 싣는 일, 살이 찔까 두려워 음식을 가려먹거나, 돈이 궁해서 씀씀이를 줄이는 일까지. 나의 삶은 사소한 부분까지 고통스럽고, 그런 삶이 사소해서 고통스럽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러므로 삶은 고통이라는, 그런 흔한 말을 할 자격이 우리에겐 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삶 속에서 언제나 환영 받는 건 아니라서, 때로는 그런 말을 대신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너의 삶은 고통스럽다고, 그러니 통증을 말해도 괜찮다고.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낸 누군가가 말해준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고통의 존재를 삶으로 직접 증명해온 이가 호탕하게 웃으며 유쾌하게 말해준다면, 우리의 고통은 “맥주 한잔 마시고”(13쪽) 즐겨도 좋을 만큼 한결 가벼워질 테다.
한대수의 사진집 『삶이라는 고통』(북하우스, 2023)을 읽는다.
거실처럼 보이는 공간이 있다. 기타 두 대와 피아노 한 대, 소파 뒤 벽에 붙은 거대한 마릴린 먼로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큰 창으로 들어오는 채광이 옅어지는 곳에 늘어놓은 재떨이는 해질녘에 연기처럼 파고들어올 감정을 예상하게 만든다. 당신의 공간에는 무엇이 찾아올까. 그곳을 채우는 건 “전부 다 고통”(7쪽)일까.
제목부터 ‘삶=고통’이라는 씁쓸한 등식을 세워놓았지만, 작가 한대수의 글은 오히려 유쾌하다. 그는 ‘만 75세’가 되었다는 사실을 “감개무량”하게 느끼며 “아직도 살아 있다. 기적이다!”(11쪽) 삶을 예찬한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사진과 함께 견딘 그는 “사진은 순간 포착”(13쪽)이라고 선언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삶을 포착한 사진만이 그의 사진이다. 그 사진은 “희미하고, 때로 포커스가 안 맞”(같은 쪽)는다. 어긋난 포커스가 삶에서 실존하는 고통의 흔적이다. 흔적은 그의 사진 대부분에 남아있다.
사진은 현실을 찍는다. “사진같이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이미지는 없다.”(13쪽) 그러나 사진이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온전히 담는 것은 아니다. 종종 SNS의 화려한 사진 뒤로 비틀거나 덮어놓은 현실이 숨는 것처럼. 이제 사진 속 현실과 우리의 삶은 정확한 동의어가 아니다. 다만 한대수의 오래된 필름 사진만큼은 삶과 정확히 닮아있다. 현실 속에 머물며, 삶을 직시하고, 포착한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현실이고 삶이고 고통이다. 윤곽이 정확했다면 오히려 진실하지 않았을 사진들이다.
한 남자가 있다. 멀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었다. 한 남자가 누워있다. 얼굴을 바닥에 파묻고, 사진으로 잡아낼 수 없는 미세한 미동을 하며. 여러 사람이 있다. 시선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 뻣뻣하게 혹은 어정쩡하게 곁에 정지한 사람들과 앵글을 벗어나려 움직이는 사람들. 시선과 다리가 격렬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미세한 미동과 격한 역동 사이, 삶의 한복판에, 고통이 놓여있다.
작가는 당신 삶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단 사실을 서슴없이 고백한다. 그는 “쥐”와 “마약 밀수업자”와 폭탄을 만드는 “쿠바 혁명 단체”가 있는 미국 “뉴욕 히피의 소굴”(76쪽)에 살면서 가난을 경험했다. 귀국 후에는 “언덕 위의 달동네로 쫓겨났다.”(77쪽)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생계와 예술을 동시에 꿈꿨던 그가 빈곤한 삶의 자리에서 얻은 교훈은 전혀 고상하지 않다. “하하! 돈은 버는 사람만 번다!”(65쪽)거나,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가 안 보였다”(77쪽)는 현실감각 정도. 하지만 적어도 스스로 부여한 삶의 방향에서 그는 여전히 유쾌했고, 당당했다.
당신은 지게를 지고 있다. 당신의 몸보다 큰 지게가 당신의 어깨를 누른다. 뒤조차 돌아보지 못하도록 머리 위까지 삐죽 솟은 지게를 지고, 오직 앞을 향하여, 당신은 간다. 짐은 없고 오로지 지게만 있어서 당신이 지고 가는 것의 무게를 알 수 없다. 지게를 진 당신이 걷는 속도를 알 수 없다.
이제는 지게가 당신을 지고 있다. 당신의 다리가 지쳤고, 어쩌면 그곳에 넘어졌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내려놓은 것이 이번엔 당신을 들어올린다. 그 오묘함은 얄팍한 균형을 맞춘다. 지게 위 당신은 넘어질지도 모른다. 지게가 다시 당신을 내려놓을 때 당신은 다시 지게를 들어야 한다. 달콤한 꿈에서 깨야 한다.
그러나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는 ‘한국의 히피(hippie)’로서 작가 한대수가 유쾌하게 용인하는 삶의 고통은 스스로의 삶을 결정할 때 발생하는 자가발전적 고통일 뿐이다. 외부에 의한 노골적인 고통을 포착할 때 그의 사진은 거의 흐릿할 정도로 초점이 어긋나고, 유쾌했던 그의 어조는 진지해진다. “이 지구상 모든 이들에게 풍족한 식량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170쪽)는 탄식이나 “3%의 최상층만이 언제나 지배한다 / 혁명도 반혁명도 이를 바꿀 수 없다”(179쪽)는 체념에는 분노마저 묻어난다.
그는 “자본주의가 최고로 발달된 사회의 결과물”(160쪽)인 홈리스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하며 셔터를 누르고, 지구 곳곳에서 여전히 끔찍한 전쟁을 막기 위해 “전 세계 인류가 일어나야 한다”(277쪽)고 결연하게 외친다. 거대한 외부가 소외된 개인을 향해 가하는 구조적 고통, 그러한 종류의 고통을 직시하고 그것의 견고함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다짐을 말하면서, 그는 <행복의 나라로>와 같은 노래를 부른다.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 보자
…
고개 들고서 오세 손에 손을 잡고서
청춘과 유혹의 뒷장 넘기며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 한대수, <행복의 나라로> 중에서
작가의 사진 속 살짝 어긋난 초점과 묘하게 삐뚤어진 구도가 어쩐지 불편하게 느껴진다. 사진은 삶을 ‘순간 포착’한 것이므로, 그 순간 그의 삶 어느 부분이 살짝 어긋나거나 묘하게 삐뚤어졌던 것일 테다. 예상과 다르게 어딘가 자꾸만 어긋나는 것. 사진에 남겨진 그 불편함이 ‘삶이라는 고통’이라면, 우리는 그 고통을 결코 피할 수 없으므로, 이토록 당연한 사진적 인생을 “천천히 음미”(310쪽)할 수밖에 없을 테다. 사진의 ‘순간’으로도 포착될 수 없는 정초점과 황금비의, 순간보다 순간적인 아주 찰나를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