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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구마 Jul 16. 2024

환상적 존재의 환상적 사랑

뮤지컬 <카르밀라>

어떤 환상을 영구보관하기에 가장 적합한 수장고는 아마도 문학이다. 인류는 머릿속에서 환상의 존재들과 그것들이 만드는 (있음직한) 사건들을 떠올린 후, 그들이 재빨리 떠나가기 전에 정교하게 기록하여 이야기의 형태로 저장해왔다. 그 대표적 존재가 흡혈귀다. 인간의 피를 마시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환상 속 존재인 흡혈귀를 그린 문학 작품들은 흡혈귀의 생명만큼이나 무궁하며 영원하다. 그 영원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예술 작품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 예컨대 아일랜드의 작가 조지프 셰리든 레 퍼뉴가 1872년에 출판한 소설 『카르밀라』가 그렇다. 그가 쓴 고딕 소설은 150년이 넘는 시간동안 강건하다. 오랜 시간 존재해온 그의 흡혈귀들이 이번엔 종이 위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그러나 여전히 치명적인 매력으로 인간을 유혹한다.


뮤지컬 <카르밀라>를 본다.



수상한 재회


폭풍우가 거센 밤, 어딘가로 떠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로라의 집에 누군가 찾아온다. 오랜 여행 중 마차 사고를 당해 잠시 머물 곳을 찾고 있다는 이들의 사연에 선량한 로라는 문을 열어주고 만다. 열린 문 사이로 밤의 어둠과 함께 들이닥친 자매들은 어딘가 불길한 느낌을 풍긴다. 이제 밤이라는 시간은 은밀한 목적성으로, 폭풍우라는 상황은 혼란스러워질 운명의 예견으로 은유된다. 홀로 외롭게 지내던 로라에게 그들의 방문, 특히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진 카르밀라의 존재는 치명적인 유혹으로 다가온다. 폭풍우 치는 밤에 찾아온 낯선 이들에게 로라는 너무 빨리, 혹은 너무 성급하게 마음을 열고 만다.


로라는 카르밀라에게 친절을 베푼다. 카르밀라는 그런 로라의 친절에 당황하며 시종일관 거리를 둔다. 너무 빨리 마음을 연 로라와 너무 다급하게 떠나고자 하는 카르밀라, 그리고 그들의 만남을 지켜보며 음미하는 닉의 행동 모두가 수상하게 보인다. 그들의 만남에 대한 우리의 불안과 의심은 그들의 차이에 기인한다. 하나는 종의 영역. 닉과 카르밀라는 인간의 피를 마시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흡혈귀다. 그들은 잔인한 방식으로 인간을 사냥할 만큼 강하고 거친 본성을 가지는 동시에 오랜 시간을 살면서 체득한 매력과 아름다움으로 인간을 유혹한다. 반면 로라는 흡혈귀를 당해낼 힘은 물론, 온갖 유혹에 대한 면역조차 갖추지 못한 어리고 순수한 인간일 뿐이다. 사냥하는 종과 사냥당하는 종이 밀폐된 한 공간에 머물 때 생겨나는 우리의 불안은 당연한 것이다.


물론 닉과 카르밀라는 로라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로라는 단순히 허기를 채우기 위한 사냥의 대상이 아닐 것이므로, 포식자와 피식자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불안은 해소된다. 그러나 하나의 불안을 넘어선 후에는 새로운 의심이 생겨난다. 그것은 기억의 영역에 있다. 로라는 어린 시절 흡혈귀에게 아버지를 잃었던 소녀다. 그녀는 참담하고 끔찍했던 그날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닉과 카르밀라는 로라가 잃어버렸던 바로 그 기억 속에 함께 있던 존재들이다. 흡혈귀들과 소녀의 만남, 혹은 재회. 닉과 카르밀라의 기억 속에는 로라가 있지만, 로라의 기억 속에는 닉과 카르밀라가 없다. 이와 같은 기억의 차이는 세 인물의 만남을 한층 복잡하고 위태롭게 만든다. 그들의 만남은 운명이기도 하고, 의도이기도 하다. 의도와 운명은 엇갈리며 치명적인 사랑의 서사를 만들어나간다.


응답받은 사랑 – 카르밀라와 로라의 경우


로라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카르밀라에게 운명처럼 끌리기 시작한다. 카르밀라를 향한 로라의 끌림은 우선 카르밀라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로라의 감정은 그 이상으로 점차 진실하고 깊어져간다. 카르밀라 역시도 로라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떼어낼 수 없다. 아버지를 잃었던 끔찍한 사건 이후 평생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듯 살아왔던 로라는 더 넓은 세상을 꿈꾼다. 흡혈귀로서 오랜 시간 존재하며 세상 곳곳을 여행했던 카르밀라는 로라의 상상 여행 친구가 되어주며 마음을 연다. 로라는 끔찍한 악몽을 꾼 밤에 카르밀라의 무릎을 찾고, 카르밀라는 그녀의 무릎에 누운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이 로라처럼 어리고 아름다운 소녀일 때부터 겪어야 했던 아주 오래된, 슬픈 이야기를. 비록 그녀들의 재회를 만들어낸 것은 닉의 의도이지만, 그녀들의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은 그녀들 자신이다. 그녀들은 고요하게 사랑을 만들어간다.


닉에 의해 흡혈귀가 되어 끔찍한 삶을 살았던 카르밀라는 10년 전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소녀 로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닉에게 바친다. 오래 전 닉에 의해 자신을 한 번 잃었던 카르밀라는, 결코 자신을 두 번 잃을 수는 없었으므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꼭 닮은 치명적 아름다움을 가진 로라를 사랑하기로 결심했던 것.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거의 모든 존재가 가지는 숙명이다. 아름다운 소녀 로라에게 자신을 투영했던 카르밀라는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보다 더욱 로라를 사랑한다. 로라는 자신을 자신만큼 사랑하는 카르밀라를 자신처럼 사랑하게 된다. 그녀들은 숙명처럼 닥쳐온 사랑에 기꺼이 응한다.


남이 만들어낸 의도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신들이 동의한 운명이기도 하다. 이토록 복잡한 재회에서 시작된 그녀들의 사랑에 로맨스라는 간단한 명칭을 붙이기는 어렵다. 다만 그녀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는 그녀에게 응답했으므로, 만약 사랑에도 결실이 있다면, 이야기의 끝에서 그녀들의 사랑은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녀들은 언젠가 함께 떠날 진짜 여행을 기약했으므로, 아주 길고 긴 여행을 함께 떠나기 전까지는 결코 헤어질 수 없을 테다. 카르밀라와 영원의 시간을 동행하기로 결심한 로라의 결심은 놀랍지 않다.


끔찍하게 짙은 사랑의 농도 – 닉과 카르밀라의 경우


뮤지컬 <카르밀라>는 흡혈귀와 인간 사이에서 발생한 환상적 사랑에 어둡고 깊은 색을 입히지만, 그 색채 아래 놓인 밑그림에는 흡혈귀만의 사랑이 거친 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흡혈귀-인간의 사랑은 슬프도록 아름답고, 흡혈귀만의 사랑은 아프도록 잔인하다. 사랑의 농도로만 따져본다면 후자의 사랑이 단연 진할 텐데, 일차적으로는 그 사랑이 보존된 채로 익어갈 물리적 시간이 훨씬 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간만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흡혈귀의 사랑은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쉽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진하다. 닉의 사랑이 끝내 실패하는 것은 그것의 농도가 너무 짙어 그녀 자신조차 빠져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500년 이상 살아온 흡혈귀 닉은 어느 날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소녀를 만난다. 소녀의 아름다움에 빠져든 닉은 소녀를 영원히 소유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먹여 동족으로 만든다. 물론 그 소녀가 바로 카르밀라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흡혈귀가 된 카르밀라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저주하며 절망 속에 살아간다. 영원한 생명을 주었지만 영구한 시간 동안 자신의 곁에서 힘겨워하는 카르밀라를 위해 닉은 결단을 내린다. 자신이 너무도 사랑하는 카르밀라를 위해, 카르밀라가 사랑하는 인간의 곁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기로 한 것. 이것은 단순히 카르밀라에게 일시적 행복감을 선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주기 위한 선택이다. 닉은 카르밀라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카르밀라가 사랑하는 인간 로라에게 그녀를 잠시 돌려주거나, 그녀가 사랑하는 로라를 자신들의 세계에 끌어들이기로 한다. 사랑을 지켜내기 위하여 사랑하는 이에게 다른 사랑을 허락하는 마음은 끔찍할 정도로 깊고 진하다. 재회한 카르밀라와 로라의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 닉의 사랑은 결코 응답받을 수 없겠지만, 닉은 사랑을 위한 사랑을 선택하고,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두 소녀가 있다. 소녀들을 만난 환상적 존재들은 우리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에 빠진다. 두 존재의 사랑은 똑같이 깊다. 다만 한 존재는 철저하게 탐했고, 다른 한 존재는 처절하게 지켜냈을 뿐이다. 그 방식의 차이에서 세상 모든 사랑 이야기는 발생한다. 너무나 사랑했을 뿐인 환상적 존재들을 위하여, 사랑을 창조한 신에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신이시여.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사랑에게) 고루 빛을 비춰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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