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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르미 Dec 13. 2024

1부  특별한 소녀 이야기

정민과의 동거

할머니가 떠난 후, 유진은 어머니를 찾겠다는 결심을 다시 떠올렸다. 이번에는 어머니를 향한 단순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자신을 위해 했던 모든 것을 되새기며, 스스로 더 강해져야 한다고 느꼈다.

유진은 할머니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새로운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 길이 어머니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찾는 여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완전히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집에는 유진의 흔적만 남아 있었고,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적막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오래도록 그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유진을 돕겠다고 나선 사람은 정민의 부모님이었는데, 정민의 부모님은 할머니 생전에 많은 도움을 받았던 이웃이었다. 정민의 아버지가 긴 병환을 앓았을 때, 할머니는 정민을 돌보기도 했고, 여러 사회단체를 통해 정민네 가족을 돕는 데 앞장섰다. 그 덕에 정민의 부모님은 할머니를 깊이 신뢰하고 존경했다.

“유진이를 우리 집에서 같이 살게 합시다. 우리도 유진이만큼이나 할머니께 빚진 게 많잖아요.” 정민의 부모님은 유진의 후견인이 되어 성인이 될 때까지 돌보기로 결심했다.     


정민의 집은 유진에게 낯설면서도 따뜻했다. 정민은 유진과 동갑내기 친구였지만, 성격은 완전히 달랐다. 유진이 조용하고 내성적이라면, 정민은 밝고 외향적이었다. 하지만 정민은 유진을 배려할 줄 알았다.

“야, 너 여기서 우리랑 같이 살면 돼.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다 말해.” 정민은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정민의 부모님도 유진을 살뜰히 챙겼다.

“유진아, 학교 다녀오면 정민이랑 간식 먹고 같이 숙제해. 부족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유진은 감사했지만,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아무리 따뜻하게 대해줘도 진짜 가족은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민네 가족은 유진에게 조금씩 진정한 의지처가 되어갔다.     

정민은 유진에게 정말 특별한 친구였다. 유진이 외로울 때는 아무 말 없이 옆에서 시간을 보내주었고, 힘든 날에는 억지로라도 웃게 만들었다.

어느 날 유진이 어머니와 할머니가 떠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정민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너 혼자 그렇게 시무룩하면 나도 우울해진다고! 나중에 내가 힘들 때도 너 이러면 안 도와줄 거야?

유진은 그런 정민의 엉뚱함에 처음으로 작게 웃었다.

“알겠어. 힘낼께.”

“그럼 됐어!”

정민은 유진에게 늘 든든한 존재였지만, 유진의 마음에서 그 이상으로 자리 잡은 적은 없었다. 그저 고맙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함께 생활하는 동안 정민은 유진의 가장 큰 버팀목이었다. 유진이 할머니 생각으로 슬픔에 잠겨 있을 때면, 정민이 조용히 옆에 있어 주었다.

“울어도 괜찮아. 지금은 마음껏 슬퍼해도 돼.”

정민의 이런 다정함 덕분에 유진은 조금씩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유진은 정민에게 고마운 마음을 느끼면서도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듯한 외로움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다.

정민은 억지로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옆에서 꾸준히 지켜봐 주며, 필요할 때 꼭 붙잡아 주었다.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르며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정민은 유진에게 그저 ‘고마운 존재’ 일뿐이었다. 어머니와 할머니를 잃은 상처가 너무 깊어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아픔을 누구에게도 완전히 내보일 용기가 없어서였을까. 정민과 함께한 나날은 유진에게 큰 위로였지만, 그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아픔을 홀로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유진은 알고 있었다. 그런 유진의 곁에 정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조금 덜 외롭고, 조금 더 견딜 만했다.     


어느 날, 유진은 식탁 너머에서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할머니도 참 고생 많으셨지... 자식 셋 앞세우고 손녀까지 키우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유진은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 외에 다른 형제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맞아. 큰아들이랑 둘째 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로 할머니는 막내아들, 그러니까 유진이 아버지한테 모든 걸 쏟으셨지. 오냐오냐 키운 것도 그런 이유지 뭐. 하나 남은 자식마저 잘 못 될까 봐 얼마나 걱정이 컸겠어?

"결국 막내아들마저 그런 여자를 만나서 전재산 다 날리고 술에 빠져서는...”

"할머니 팔자도 참 기구하셔. 손녀까지 두고 가는 심정이 어땠겠어?"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유진은 눈물이 쏟아졌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애지중지 키워주셨는데 그런 할머니가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겪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얼마나 힘드셨을까?’

유진은 스스로가 너무 미웠다. 자신의 존재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자신이 엄마 생각에만 빠져서 할머니를 외롭게 했던 순간들도 모두 부정하고 싶었고, 할머니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방으로 돌아온 유진은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베개를 껴안고 흐느꼈다.

"할머니, 정말 미안해요. 정작 난 할머니 마음을 하나도 헤아리지 못했어."     

울음소리가 방문을 넘어 들렸던 걸까. 정민이 살며시 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괜찮아?"

유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흐느낌은 멈추지 않았다.

정민은 아무 말 없이 유진 옆에 앉았다. 위로의 말도, 억지로 달래려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유진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정민의 다정한 행동에 유진은 조금 진정이 되었다. 비록 할머니의 품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이제 그 사랑을 마음속에 새기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정민은 언제나 그랬듯, 그녀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묵묵히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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