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괜찮겠어?"
도훈이 걱정스럽게 묻자 유진은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응. 당분간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어요. 고향에도 좀 다녀오고 정민이도 좀 만나고 올게요."
유진은 짐을 챙겨 고향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다가 정민의 부모님을 만나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 했다.
"유진아, 정말고생 많았다. 너의 할머니는 자식일이라 그런지 아무리 미심쩍은 일이 있어도 일절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 네가 병원에 실려가고, 너의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고, 그 여자 주변에 온갖 흉흉한 일들이 생기고 할때는 온 동네가 술렁거렸어. 그래도 다들 짐작만 했지 증거가 있어야 말이지. 아이고 암튼 잘됐다 잘됐어. 내가 다 속이 시원하다. 10년 묵은 채증이 싹 내려간것 같어."
정민의 부모님은 유진의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해 주었고 유진은 정민의 부모님께 그간 보살펴주고 신경써 주어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정민이 있는 대학 캠퍼스로 향했다.
유진은 정민이 강의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정민아!"
정민은 그녀를 보자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다.
"어? 유진아, 웬일이야?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유진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너 보고 싶어서 왔지. 너 바쁜데 방해된 건 아니지?"
"방해는 무슨. 네가 오니까 너무 좋다."
두 사람은 근처의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민은 먼저 말을 꺼냈다.
"얘기 들었어. 재판 잘 마무리됐다며?"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너랑 도훈이 덕분에 모든 진실을 알게 됐어. 네가 없었으면 이렇게까지 못 했을 거야. 정말 고마워, 정민아. 넌 내 평생 친구야."
유진은 웃으며 정민을 와락 끌어안았다. 정민은 당황한 듯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내가 뭘 했다고. 넌 스스로 해낸 거야. 난 그냥 옆에 있어준 것뿐이야."
대화를 이어가던 중, 유진은 갑자기 눈을 내리깔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새엄마보다 아빠가 더 용서가 안 돼. 아빠가 엄마를 그렇게 만든것도... 그동안 방관한것도... 나를 버리고 떠난것도... 모두 원망스러워."
정민은 잠시 생각하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유진아, 사람이 누군가에게 정신적으로 지배를 받게 되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잃어버릴 때가 있어. 아버지도 그런 상태였던 것 같아. 보통 상대방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또는 사랑이라는 말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결국 스스로 선택할 힘을 잃게 하지.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닐 거야. 단지, 그 사랑을 표현하고 지키는 방법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싶어."
유진은 정민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정민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덧붙였다.
"아버지를 용서하는 건 쉽지 않을 거야. 부모라도 용서받지 못한 잘못을 했을때는 용서하지 않아도 돼. 네 마음 가는대로 결정해.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난 항상 네 편이야."
두 사람은 따뜻한 미소를 나누며 잠시 고요한 캠퍼스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유진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온함 속에서 앞으로의 삶에 대한 용기를 얻기 시작했다.
유진은 혼자만의 여행을 마치고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도훈과 함께 심리 치료를 시작했다. 상담실은 따뜻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고, 상담사는 차분하고 신뢰감 있는 목소리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유진 씨, 여기 오신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내셨습니다. 오늘은 마음이 편안할 수 있도록 가볍게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으로 시작하죠."
유진은 처음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많은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저를 괴롭혔던 기억들이 자꾸 떠오르고, 아빠에 대한 원망도 쉽게 가시지 않아요."
상담사는 유진의 이야기를 경청한 뒤 설명했다.
"유진 씨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트라우마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며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우리가 함께 그 기억을 마주하고,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작업을 할 거예요."
도훈도 유진을 위해 자신의 고민을 나누었다.
"저는 유진이 아프거나 슬퍼할 때마다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할 때가 많아요."
상담사는 도훈의 솔직한 마음을 칭찬하며, 파트너로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기로 했다.
세션 중에는 유진이 겪었던 사건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그때의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상담사는 유진이 고통스럽게 느꼈던 장면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묻고, 그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왔다.
"그때는 모든것이 제 잘못인 줄 알았어요. 제가 부족해서 그랬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알겠어요. 내가... 당당해도 된다는 걸."
유진과 도훈은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자유롭게 공유하는 대화 연습도 했다. 도훈은 유진의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유진은 도훈에게 의지하면서도 스스로 강해질 수 있는 힘을 키워갔다.
"여기를 보세요. 이건 유진씨의 지문검사 결과지와 영유아 지능테스트 결과지에요. 유진씨가 어릴때부터 발육도 빠르고 워낙 똑똑해서 어머니가 호기심에 테스트 해 보신것 같아요. 그걸 도훈씨가 찾아내어 수집해 놓은 거구요."
도훈이 서류들을 받아 유진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유진아, 잘 봐. 넌 애기때부터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였어."
도훈의 말을 받아 상담사가 또 다른 자료들을 펼치며 설명을 이어갔다.
"자, 이것도 한번 보시겠어요? 이 자료들은 유진씨를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할머니와 함께 복지관에 다니며 상담받은 자료들입니다. 여기엔 경계성 지능장애가 있다는 소견과 함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상태라고 되어 있어요. 이는 원래 똑똑하고 영리한 유진씨가 엄마를 잃고, 아빠가 재혼하면서 뇌 기능에 손상을 줄 정도의 심한 스트레스와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럼 이제 무얼 해야 할까요?"
상담사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눈을 마주쳤다.
"지금부터는... 원래의 유진씨로 돌아갈 수 있도록 치료에 힘써야겠죠?" 유진은 도훈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간절함을 눈빛으로 표현했다.
치유 과정에서 유진은 점차 자신의 상처를 받아들이고, 아픈 기억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도훈 역시 유진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더욱 깊이 신뢰하며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1년 후 상담사는 두 사람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했다.
"유진 씨, 도훈 씨, 두 분은 서로를 지지하며 큰 변화를 만들어냈어요. 이제 과거의 상처를 안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지셨습니다. 새로운 행복을 만들어가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상담을 마친 유진과 도훈은 함께 손을 잡고 상담실을 나섰다. 벚꽃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분홍빛 꽃잎이 눈처럼 흩날렸다. 햇살은 따뜻했고, 공기 속엔 봄 특유의 상쾌함과 달콤함이 묻어났다.
도훈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저 꽃잎이 너의 밝은 미래를 축복해주는것 같아." 그는 나뭇가지 사이로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진도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 사이로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잔잔한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 풍경 속에서 두 사람은 잠시나마 모든 걱정과 혼란을 잊고 봄을 온전히 느끼며 서로의 곁에서 밝은 미래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