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0대 중반이 되면 멋있는 여성이 될 줄 알았다. 직업적으로 성공하고, 정서적으로도, 심리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는 멋진 여성. 완전한 자립을 꿈꾼 것이다.
하지만 이게 웬걸? 내가 깨달은 것은, 자립이야말로 내 인생을 통틀어 해내야 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라는 사실이었다. 매달 쏟아지는 집세, 공과금, 생활비, 다음 직장을 위한 교육비를 온연하게 충당할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독립한 성인으로써 누군가의 탓을 하지 않고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온연히 책임지며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내가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자립되지 못한 인간임을 깨달았다. 결핍은 반드시 타인에게 의존적인 사람의 모습으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나의 문제는 정반대였다. 내 문제는 뒷전으로 하거나 다른 사람의 해결사 노릇을 해주려고 했다. 일종의 구원자 콤플렉스라고 하지. 지나치게 높은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나 자신을 학대했다. 필요한 순간에도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았다. 나 자신을 돌보고 책임지지 않았다는 면에서, 그리고 나를 망가뜨린 원인을 온연히 가족과 세상 탓으로 돌리려고 했다는 점에서 나는 자립되지 못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이면에는 열등감이 있었다. 학창 시절의 따돌림과 비장애형제로서 가족 내에서 느꼈던 소외감이 나의 열등감을 구성했다. 내 안에 있는 수치심과 불안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어쩌면 타인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이타적인 행동을 통해 인정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요새 이기적으로 살려고 맘을 먹었다. 2026년. 나는 건강하지 못하게 끌어온, 오래된 관계들을 정리했다. 나의 감정과 욕망을 가장 우선시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이기적인 욕망과 세상을 향한 이타성이 일치하는 지점을 찾고, 나를 착취하지 않는 선에서 이타성을 발휘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적당히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기에. 내가 발휘한 약간의 이타성과 타인의 이타성. 그 작은 물방울이 모이면 이 세상에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 믿게 되었다. 진정으로 자립하는 순간 나는 홀로 서면서도 모순되게도 혼자가 아니게 될 것이다.
타인 역시도 삶이 주는 고통과 아픔, 슬픔, 상실감, 분노를 온연히 감당해 나가야 한다. 그것은 생명체의 숙명이다. 우리 모두는 자립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나와 동등한 주체이다. 그러기에 만약 상대가 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거절해야 하고, 그 실망감을 상대가 온연히 감당하도록 대신 해결해주지 말아야 한다. 상대의 결핍을 구원하고 해결해주려고 하는 욕망은, 어쩌면 상대를 미숙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며, 어떤 의미로는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실은 나의 미숙함을 투영하는 것이기도 하고. 나 스스로가 요동치는 감정을 담아둘 수 없는 사람이기에, 상대의 요동치는 감정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아프지 않도록 미리 해결해주려 하는 것이다(음, 내 이야기다). 하지만 살아가는 한, 특히 독립된 주체로써 존엄한 삶을 살아가는 한 아픔은 피할 수 없다. 아픔을 견딜 수 있는 내성을 키워갈 뿐.
고백하자면 나도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대신 해결해주려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올해는 연습해보려 한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의 생겨먹은 모양 그대로 내버려 두기 연습'
요새 나는,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가려고 하고 있다. 가족을 미워했던 시간이 길었다. 그 감정 중 일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부모를 '가까운 타인'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 외에 원하는 것들은 쉽지만 어렵다. 매일의 소소한 일상을 잘 꾸려가는 것. 생활력을 기르는 것. 나의 감정에 진실되려고 노력하는 것... 나에게 관대할 것.
이게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자립의 주제'이다. 30대의 중반의, 이뤄놓은 거 하나 없는 내가 자립을 위한 어떠한 노력을 해 나가는지 소소하지만 기록해보려고 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