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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요커 Feb 04. 2022

아빠가 되어보니 달라진 나의 생일

조금 더 철이 들다

미국 동부 2022년 1월 10일 오전 11시 04분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잊지 못할 너무 큰 감동스러운 순간을 맞이했다. 10개월을 아내의 뱃속에서 발차기와 딸꾹질로 나와 교감하던 아기천사 '두두'는, 이안이가 되어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선물로 세상에 나타나 주었다. 40주, 그리고 정확한 예정일인 1월 10일에 3.77kg이라는 건강하고 우람한 체격으로 두두는 우리에게 와주었다.


입덧도, 심각한 감정 변화로 인한 우울증이나 임당 문제 등 큰 문제없이 비교적 안정적인 임신 기간을 가졌던 아내는 그야말로 "Happy Pregnanct Lady"였다. 그래도 그 무거운 아이를 뱃속에 두고 감당해야 할 신체는 분명 무리가 컸을 것이고, 그 힘든 시간들을 묵묵히 견디고 기쁘게 두두를 기다려준 아내가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나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분만실 동반 입장을 선택했고, 그날을 기다려왔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분만 예정일을 delivery day라고 부른다. 우리가 아는 배달의 딜리버리인데, 아이를 세상으로 배달해주는 느낌이라 일상에서 매우 흔한 단어였지만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딜리버리 코치로 아내와 함께한 출산의 순간


1월 9일 밤 8시 30분

아내는 배가 조금씩 아파옴을 느꼈으나, 참을성이 많아서인지 그것이 가진통인지 진짜 진통인지 구분하기 어려워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챙겨둔 케리어 가방과 함께 부랴부랴 나머지 짐들을 챙겨서 설레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병원을 향했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기억도 나지 않던 순간을 제외하고는 분만실에 가보는 것은 난생처음이라 두려움이 앞섰다. 분만실 및 입원실에 들어가기 전 점검을 하기 위해 이런저런 장비를 착용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국과 다르게 미국은 정말 출산이 임박하고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병원에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궁문이 3cm 이상 (경우에 따라선 더 많이 요구하기도)은 열려야 의사 판단하에 병원에 입원을 시키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고, 양수가 터져서도 느긋하게 분만 준비를 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우리가 방문했던 같은 시각에 우리보다 잠시 먼저 온 산모와 남편은 간호사에게 멀쩡하게 걸어 들어가면서 Broken water, 즉 양수가 터졌음을 이야기하였는데 새삼 놀라운 광경이었다. 늘 미국에 병원에 가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의 의료 서비스는 정말 최고라고 생각한다. 악명 높은 미국 의료 서비스와 비용은 실제로 살면서 느껴봐야지만 얼마나 보험료가 아까운지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어쨌든 아내는 그렇게 이런저런 장비들을 착용하고, 대학병원 담당 의사가 와서 내진을 했는데,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직 준비가 안되었다며 안타깝지만 오늘은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해줬다. 다만, 진짜 진통과 출산은 당장 새벽에라도 진행될 수 있으니 언제든 다시 아프면 돌아오라고 이야기하였다. '우리가 너무 몰라서 그랬는지'라고 헛걸음을 자책하며 집에 돌아가는데, 아내는 여전히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통의 간격은 점차 짧아져갔다. 진통의 강도를 1~10으로 산정하고 답변을 하게 했는데, 병원에 갔을 때 5~6 정도의 진통이라면, 병원을 나서면서 집에 도착해서는 7~8 정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내는 다시 헛걸음을 하기 싫어 다음날 아침까지 참아보겠다고 연신 병원 가기를 미뤘다. 그러다가 새벽 1시쯤, 아내는 식은땀을 흘려가며 큰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완전 다른 고통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이게 출산이 다가오는 진통이 맞는지 확신을 갖지 못했다. 나는 어차피 가서 또 퇴짜를 맞더라도 아내가 걱정되는 마음에 무작정 아내를 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차량 블랙박스 (Dashcam)에 찍힌 고통스러운 모습


사실 8시 30분에 병원에 가면서 대화도 되고, 겉모습은 멀쩡한 아내를 보면서, '내가 아무래도 드라마를 너무 믿었었나 봐. 드라마 보면 다들 차 타고 가면서 막 이것저것 부여잡고 힘들어하는데, 당신은 지금 정말 평온해'라고 했었는데, 이번엔 완전 상황이 달라졌다. 드라마처럼 절규는 아니더라도 이를 악물고 끙끙 앓아가면서 아내는 심호흡을 하기 위해 노력을 하면서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해서는 의사 및 간호사들도 바로 분만실 입원을 준비하기로 했다. 코로나 검사를 비롯한 필요한 검사들을 마친 후 분만실에 들어서니 새벽 3시가 되어갔고, 다행히 아내의 상태를 기준으로는 원하면 무통주사인 '에피듀럴'을 투여할 수 있었기에 아내는 진통을 없애고자 무통주사를 요청하였다. 8~9 정도 느껴지던 진통은 2~3 정도로 감소되었고, 잠시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출산을 준비할 수 있었다.


아내의 상황을 진찰한 간호사는 산부인과 의사와 연락을 하였고, 늦은 오전경 출산이 예상되어 날이 밝고 오전 9시 정도에 입원해있는 대학병원 분만실로 찾아오겠다고 하였다. 다소 생소할 수 있겠으나, 미국은 대부분 산부인과 개인 병원에서 임신 기간 중 진찰과 검사를 받고, 해당 의사가 아이를 받는 의사라면 항상 비상 대기를 하고 있다가 산모가 지정한 병원에서 출산을 결정하면 해당 병원으로 와서 출산을 리드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산부인과 의사가 어느 병원에서 출산을 지원하는 의사인지를 먼저 확인한 후 지정의로 결정해서 임신 기간부터 출산까지 여정을 함께해야 한다. 어쨌든 새벽을 기다림 속에서 보내고 아침이 밝았고, 9시가 조금 지나서 선생님과 조우하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서인지, 간호 인력이 부족해서인지, 나는 간호사로부터 아내의 출산을 도울 수 있는지 질문을 받게 되었고, 흔쾌히 아내의 출산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아내가 아이를 밀어내기 위해 힘을 줄 때마다 간호사와 함께 양 옆에서 아내의 무릎을 받쳐주면서 아내가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도록 서포트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의 고통은 점점 더 심해져갔고, 그런 아내를 볼 때마다 울컥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힘을 주기 시작한 지 1시간 정도가 지나자 아내는 사람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닌, 정말 동물적인 비명, 아니 절규를 뱉어내는데, 내겐 아름다운 소리이자 가슴이 찢어지게 안타까운 소리였다. 한 번 강하게 힘을 줄 때마다 3번의 시도를 했었는데, 수많은 시도를 하면서도 놀랍게도 아내는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설령 짧게 힘을 주더라도 아이를 위해서, 혹시 자신이 힘을 주다 멈추게 되면 아이가 힘들어질까 있는 힘을 다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 아내가 정말 존경스러웠고, 멋있었다.


10시 30분 정도가 지나자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도 동참하여 적극적으로 아내에게 힘을 낼 것을 주문하면서 상황 확인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출산이 임박했음을 직감하여 아내에게 상황을 전달해주시면서 더욱 힘을 낼 수 있도록 서포트하였다. 이윽고 아이의 머리카락 뭉치가 보였고, 잠시 후 아이는 세상을 향해 자신의 머리를 보여주며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속적인 시도 끝에 다다른 오전 11시 04분. 아이는 온전히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나는 울음소리, 팔다리가 움직이고 있는 아이의 활동, 그리고 너무 힘들어 지쳐있는 아내의 모습에 엄청난 눈물을 쏟아냈다. 정말 말로,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과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아내에게, '여보, 이안이가 나왔어. 우리 두두가 나왔어. 너무 잘 움직이고 있어'라고 이야기하며 우리 둘은 그저 펑펑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직접 아이의 탯줄을 자르며 아이가 세상에 온전한 독립체로, 하나의 인간으로 세상에 나타났음을 선포했고, 아내는 'skin to skin'으로 불리는 아이를 처음 품에 안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한 가족이 되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생존 과정과 육아 과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지만, 특히 우리 둘 다 부모님들께서 한국에 계시기에 단 둘이 육아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 너무나도 힘들지만, 아이가 탄생했던 그 순간의 기억들은 아주 선명하게, 그리고 흐뭇하게 기억 속에 박제되었다.



나는 아이가 태어나던 그 순간, 그리고 아이를 힘들게 키우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존경스러워졌다. 특히 1월 29일은 내 생일이었는데,

내가 주인공인 생일이 아닌 거의 40년 전 내 어머니가 겪었을 고통, 내 아버지가 헌신한 모든 순간들을 생각하니 내 생일의 의미가 크게 달라져 다가왔다.

내가 태어나서 기쁜 날이기보다 내 탄생의 순간부터 양육의 과정, 그리고 지금의 나를 응원하는 부모님의 마음까지 모든 것 하나하나가 감사하고 소중하게 다가왔고, 더 이상 나만의 생일이 아닌 내 부모님의 날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더 어리고, 지금의 우리보다 정보가 더 부족한 시대에 넉넉치 않음에도 나란 존재를 세상에 나올 수 있게

지금 나의 아내처럼 처절한 절규로 고통을 이겨냈을 어머니의 그 순간,
나처럼 체력이 바닥나 몸이 아파도 안고 달래줬을 아버지의 그 순간을 생각하면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의 은혜가 새삼 더욱 감사하게 다가온 나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나보다 더 체력적으로, 신체적으로 힘들어 하고 있을 아내를 위해 눈물 흘리시고 마음 아파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하고 감동적인 하루이기도 했다.


우스갯소리로, '너 같은 자식 한 번 낳아봐야 해', '부모가 되어봐야 한층 더 성숙하게 된다'라는 말들을 가볍게 여기거나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새삼 뼈가 있는 말들임을 알게 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건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할 테지만, 적어도 이안이의 탄생은 내겐 그동안 나만 이기적으로 생각하며 자라왔던 나에게 적잖은 충격과 반성을 안겨준 일생일대 가장 큰 이벤트였다. 그래서 조금은 더 나은 자식이 되어보겠노라고, 항상 더 부모님을 생각하고 챙기겠노라고 다짐을 해보고 있다.


나는 아직도 많이 성장해야 하고, 더 속이 깊어져야 하는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도 이번 아이의 출생과 나의 심경 변화는 나 스스로도 조금은 성숙해진 과정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변화였고, 인생의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앞으로도 더 좋은 자식이자, 좋은 부모가 되겠노라고 공개적으로 다짐을 외쳐보면서 오늘의 글을 마친다.

힘들어도 힘듦을 그냥 잊게 만들어주는 내 인생 최고의 동기부여 ♥

 



오늘도 시간 내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이의 탄생을 준비하고, 맞이하고, 양육하는 과정을 상상으로만 접하다가 실제로 경험해보니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와 더불어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드는 일을 미루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조금 더 많이 부지런해져서 많은 정보와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작가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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