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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숲사진가 May 14. 2024

[ICELAND] 첫 번째 빛 (EP.7)

모든 여정을 이끌었던 존재와 첫 번째로 마주쳤다.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회픈에서의 밤, 나의 선택은 스톡스네스였다.
2022년 12월 21일 밤, 회픈 숙소 주차장


레이캬비크에서는 오로라를 볼 수 있던 몇 번의 기회를 놓쳤고, 비크를 지나오던 길에는 구름이 가로막고 있었다. 또한 그 길에서 만난 악천후를 뚫고 남부로 오는 과정 속에서 잠시동안 밤에는 오로라 사냥을 떠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나였다. 다행히 회픈까지 넘어온 지금에는 날씨가 잠시 얌전해져 있었고, 회픈 주변에는 오로라를 관측하기에 근사한 장소도 많았다. 다시 요쿨살론으로 돌아가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오로라가 가장 잘 보이는 시간대인 11시 언저리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한 선택지인 인근 해안가인 스톡스네스라는 지역을 구글 맵에 찍었다.


이날 밤에는 모르고 있었지만, 스톡스네스가 가지는 지리적 의미는 제법 컸다. 볼거리가 풍성한 자연의 보고였으며, 이곳을 감싸고 있는 베스트라호른이라는 큰 산세를 지나면 남부를 벗어나 동부로 가는 길목으로 들어설 수 있다. (규모가 제법 있는 지역이기에 제대로 모두 둘러보려면 꼬박 하루에서 이틀을 보낼 수도 있다고 한다.) 지난번 아이슬란드에 왔을 때는 이곳 회픈까지만 왔다가 다시 레이캬비크 쪽으로 돌아갔었다. 즉, 이 관문을 내가 통과하면, 그 순간부터 내게도 눈앞에 나타날 모든 것이 새로운 존재들이 되는 것이었다. 이 여행의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가 될 곳이었다.




2022년 12월 21일 밤, 바이킹카페 & 스톡스네스


물론 저 순간의 나는 위에 언급한 내용 중 단 하나도 모른 채, 그저 오로라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차를 달리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것은 그저 '험준한 산세와 바다를 끼고 있는 지형으로 보이니 오로라만 하늘 위에 걸려준다면 꽤나 괜찮은 그림이 나오겠구나'라는 단순 무식한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적당히 인적이 드물면서도 회픈에서는 가까웠으니까, 매일 밤마다 돌아다니며 체력 소모를 감수해야 할 나에게는 굉장히 단순하지만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오늘만큼은 무언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을 함께 끌어안고 내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에만 의존한 채 나아갔다.


약 20분 정도의 운전 후, 네비의 위치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내 눈앞을 차단기가 가로막았다. 우리가 흔히 한국의 공영 주차장이나 대형마트 주차장 입구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차단기였다. 그런데 통상적인 한국인의 생각이라면 응당 그 차단기에 일종의 결제를 할 수 있는 장치가 함께 마련되어 있어야 할 것인데,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지도가 가리키는 위치가 틀렸을까 고민했지만 지도가 이 상황에서 틀렸을 리는 없다고 확신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진입로 바로 옆에 <바이킹 카페>라는 곳에 딸린 주차장에 차를 잠시 세웠다. 밤 11시에 가까운 시간이었으니 당연히 카페는 닫았겠지만 혹시나 관계자나 거주자라도 카페 건물에 있다면 물어볼 요량이었다.


다음 날 다시 날이 밝은 후에 찾아갔던 바이킹카페. 저 문 옆에서 스톡스네스 입장 표를 구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 의문은 제법 빠르게 풀렸는데, 오두막집 같이 생긴 카페로 들어가는 문 바로 옆에 스톡스네스로 진입하는 티켓의 무인 발권기를 발견한 것이었다. 일종의 통행료를 지불하고 이곳에서 표를 발권해야 저 차단기를 열 수 있었던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것도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카페에서 스톡스네스로 들어가는 통행료 관리까지 겸하고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은 이다음날에 다시 이곳에 방문하고 나서야 뒤늦게 알게 되었던 사실이었다. 이런 일과 일 사이의 연계성에 의미 부여가 강한 편인 나는 '생각보다 일이 괜찮게 풀려가는군. 예감이 좋아.' 하는 생각에 표를 끊어 들고 차를 몰아 다시 차단기로 향했다. 




차단기를 열고 다시 차와 함께 스톡스네스 지역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자,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기 시작했다. 바이킹카페를 뒤로 하고 조금만 더 전진하자마자 다시 단 한 점의 불빛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만에 의지해서는 지금 어떤 지형지물이 내 주변에 있는지 전혀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일반적인 길을 벗어나 해안가로 진입한 상황이었기에 불안함은 이내 증폭기를 통과한 울림처럼 순간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 도로 양옆으로는 푹 빠지는 길일 수도 있지 않을지, 그리고 중간중간 일반 굳은 땅과는 다른 폭신한 촉감이 타이어를 타고 차 안에 있는 나에게까지도 전해지고 있었으며, 이 길이 어디까지 계속 이어져 있는지 또한 알 길이 없었다. 계속해서 전진해야 할지에 대한 막연함과 그 두려움이 나의 이성을 점점 마비시켜 가는 것을 느꼈다. 만에 하나 차가 눈밭이나 깊은 모래밭에라도 빠지는 순간 꼼짝없이 조난이었다.


물론 이 깊은 밤 위험한 노지에서 혼자였기 때문에, 완전히 정신을 놓는 순간 모든 게 끝인 것이었다. 믿고 의지할 존재가 없다는 것은 스스로의 판단과 감을 믿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기도 했다. 우선 차를 이곳에 세워보기로 하고 차의 시동과 모든 불을 껐다. 공연이 끝나고 소등이 완료된 무대처럼 순간적으로 모든 시야가 블랙아웃 상태가 되었다. 암흑 속에 그대로 나를 맡긴 상태가 된 것이다.


약 3분 정도 혼자 아주 긴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다독인 후에 나는 삼각대와 카메라를 챙겨 들고 차에서 내렸다. 어둠에 눈이 익기 시작했기 때문에 주변의 아주 대략적인 지형이 보일 듯 말 듯했지만 여전히 단 한 점의 불빛도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큰 문제였다. 바람이 찢어질 듯한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고, 뒤편으로는 베르스타호른의 윤곽이 보였으며, 파도소리가 간간이 섞여 들려오는 것을 보니 바닷가에 온 것은 맞는 것 같았다. 


'장님과 다를 바 없는 이 상황에서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그 순간 꽤나 바보 같으면서도 괜찮은 생각을 해냈다. 이 상황에서 사방으로 사진을 찍어대면, 장노출의 사진이 담아낼 사진은 더 밝을 테니 지금 이곳 주변 지형을 찍힌 사진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 어딘가로는 움직일 방향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두려움을 걷어내기 위해 어떤 행동이라도 취해야겠다는 생각에 재빠르게 삼각대를 펼치고 카메라를 설치했다. 베스트라호른의 윤곽이 보이는 곳 쪽에 아마 바다도 같이 보일 것이니, 그쪽 방향으로 아무렇게나 단단하게 고정 후에 렌즈 초점을 무한대로 두고 타이머로 셔터를 날렸다. 그리고 잠시 후 카메라 스크린에 나타난 결과물은 모든 상황을 뒤집었다.



카메라가 잡아낸 모습은, 베스트라호른의 위를 뒤덮은 구름 뒤편에 살짝 숨어 있던 오로라였다.


그 순간 그 자리에 나는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의 이성을 마비시켰던 두려움과 너무나 오래된 기억 속에 가물가물하여 보지 못했던 모습을 마침내 알아볼 수 있었다. 산 위로 아스라이 빛나고 있는 저 초록 불빛, 단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것은 분명 내가 지난 8년 동안 찾아 헤맸던 존재였다. 이 여정을 기어이 시작하게 만들었던 모든 근원의 빛.


왜 차와 내가 밟고 있던 지면이 이따금 푹신한 곳이 있었는지도 그 재서야 눈치챘다. 바닷가의 모래와 풀들이 섞여있는 언덕이 있어 푹신하면서 경사진 면들이 이따금씩 발의 감촉을 통해 느껴졌던 것이었다. 그곳으로부터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스톡스네스의 바다가 해안가의 한편으로 드넓게 깔려 있었다. 


이 순간부터는 다른 의미로 이성을 잃고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난 저 빛을 8년 동안 쫓았던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단 일말의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는 비장한 모습으로 (물론 저 순간 저 장소에는 오직 나 밖에 없었으니 날 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찍힌 사진으로부터 감에 의지한 채 조금씩 구도를 바꾸며 그 시공간 속에서 내가 본 모든 요소들을 한 프레임에 담아내려 했다.


베스트라호른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웅장했고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들고 갔던 삼양의 초광각렌즈가 '화각이 너무 좁다'라고 느껴본 적은 아마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다. 사진에 담긴 것보다도 훨씬 더 높고 험준한 인상이었다. 산을 모두 담아내면서 동시에 검은 모래와 바다까지 함께 담으려 하다 보니 구도에서 많은 타협을 봐야 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오로라 위에 무수히 빛나고 있는 별들도 잊어서는 안 됐다. 아주 길지는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빙하 이상의 훨씬 더 벅차오르는 재회의 감정을 그렇게 이곳에서 만끽했다.


여행의 첫 오로라. 그리고 감격스러웠단 8년만의 첫 재회.


2022년 12월 22일 새벽, 회픈-요쿨살론 사이 구간 1번 국도


감동과 희열로 끓어오르기 시작하니까 이젠 제법 용기와 기세가 생겼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 어느덧 새벽을 흘러가고 있었다. 칠흑 같던 어둠 속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제 제법 기세등등해진 나는 이제 스톡스네스를 벗어나 다른 지점으로 이동해서 오로라를 계속 즐겨보기로 했다. 


오로라는 태양풍이 부는 방향에 따라 그 형상이 결정되기 때문에 언제나 그 모습이 같지는 않다. 어떨 때는 빛이 발산하듯이 중앙점으로부터 퍼져나가는 모양이기도 하며, 횡으로 이어져 있거나 종으로 펼쳐져 커튼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날의 오로라는 횡으로 끝없이 이어진 모양이었기 때문에, 1번 국도를 중심으로 움직이며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스톡스네스를 지나 동쪽으로 더 넘어가는 순간 터널을 통과해 동부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모르는 길을 감수하는 위험 대신 나는 요쿨살론 방향 쪽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요쿨살론까지 다녀올까도 다시 한번 고민해 봤지만 왕복 160km의 거리였고, 바로 다음날 동부로 떠나야 했기에 지나치게 무모한 도전은 하지 않기로 했다.



요쿨살론을 떠나 회픈으로 오던 길 그 중간쯤 어딘가에 다시 되돌아가, 스카프타펠 만년설이 보이는 곳의 길 중간 갓길에 차를 세웠다. 이번에는 갓길에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 한 팀이 더 있었고, 1번 국도 한복판이라는 주변 식별도 원활했기 때문에 다행히 암흑 속의 막연함이 주는 두려움은 훨씬 덜했다. 물론 앞선 작은 성공이 더 큰 성공을 향해 갈 수 있는 탄력이 되어주는 나의 성격도 한 몫했다. 아마 직전 스톡스네스에서 허탕을 쳤다면 이야기는 분명 달랐을 것이었다. 한 순간의 셔터를 누르기까지에는 분명 그 순간을 찾아가는 과정이 주는 동기부여의 힘도 중요했다.


이번에 보게 된 것은 1번 국도의 옆으로 펼쳐진 남부의 광활한 평야와, 그 뒤를 감싸고 있던 스카프타펠 만년설,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진 은하수와 오로라가 수놓은 밤하늘이었다. 오로라에 주목하고 있었지만 별들과 은하수도 정말 쏟아질 듯 무수한 점들로 하늘에 박힌 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은하수의 뻗어나감과 오로라에 집중하여 세로 구도로 한 장을 기록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으로 횡으로 펼쳐진 오로라의 무한한 뻗어나감과 은하수를 동시에 담았다. 지평선은 최대한 간결하게, 그리고 한 장의 그림 같은 저 밤하늘은 가능한 한 넓은 구도로 잡아넣었다. 한국에서 별을 보러 다니던 여행에서도 내가 좋아하던 구도 중 하나였다.


누구나 이런 풍경 앞에 선다면 겸허해질 것이다.
오로라가 없이 별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밤하늘


반드시 담아내고 싶었던 기록도 모두 담았고, 내 옆에 자리 잡고 있었던 여행자들도 이미 자리를 떴지만 나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라도 처음 떴을 때의 모습보다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이 명확히 느껴지기 시작하고 나서야, 나도 비로소 삼각대를 접고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물론 오로라를 보고 있던 1번 국도의 한편에서 뒤돌아 다른 방향을 보면 오로라는 보이지 않지만, 은하수와 수많은 별들을 볼 수 있는 다른 풍경이 있었다. 그 또한 놓치지 않고 철수 준비 도중에 함께 기록으로 남겼다. 


도로 한복판 위에 삼각대를 세워두고 홀로 서서 오로라와 내가 함께 나오는 사진을 내심 찍기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샛길이나 다른 국도도 아니고 1번 국도 한복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무리 깊은 밤이었어도 위험했다. 그날의 몫은 거기까지였던 것이었다. 나머지는 분명 이 여행의 다른 날, 다른 내가 채워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직 가야 할 여정이 정말 길게 남아 있었고 그 남은 시간의 가능성에 점점 기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한번 더 오로라를 돌아보며 다시 차를 회픈으로 돌렸다. 


그렇게 2014년 11월 어느 날에 멈춰있던 나의 기억 속 시계는 2022년 12월의 이 날 밤으로 다시 흘러, 선명한 기억으로 갱신되어 나의 기억 속 자리 한편에 소중히 자리 잡게 되었다. 여정은 아직 회픈에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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