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휴가로 가족들과 1박 2일의 욕지도여행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통영 시내를 지나는데 눈에 익은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충무비치호텔. 내가 젊은 시절 잠시 일했던 곳이다. 사십여 년의 세월에 반짝반짝 빛나던 모습은 퇴색되어 흰머리 희끗희끗한 내 모습 같았다.
그때가 내 나이 아마 스물세 살 때였지. 그 해 여름 군복무를 마치고 머리가 채 기르기도 전에 큰 형님은 지인이 근무하고 있는 통영 충무비치호텔에 나를 보냈다.
하릴없이 집에서 놀기도 그렇고 객지에라도 가서 취직을 하라고 떠밀어서 얼떨결에 낯 선 통영으로 내려왔다.
통영 서호동 중심가 대로변에 위치한 충무비치호텔은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역의 명소였다.
호텔일이라곤 처음 접해보는 나는 지배인, 선배 직원들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나씩 배워나갔다. 호텔 근무복장은 간단하다. 까만 바지에 하얀 와이셔츠, 나비넥타이가 전부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일반급 호텔이지만 객실이 서른 여개 되고 1층엔 프런트, 로비와 커피숖, 2층엔 사우나가 있고 꼭대기 7층 스카이라운지에는 식사와 음료, 칵테일 바가 있었다.
호텔이 작다 보니 1년도 되지 않는 근무 기간 동안 호텔 일을 거의 경험해 보게 되었다. 처음엔 투숙객들을 객실로 안내하는 일부터 하였다. 호텔에선 이 역할을 ‘벨 보이’라 부른다.
투숙객의 가방을 들고 객실까지 안내하고 필요한 물품 등을 심부름하기도 한다. 식사 같은 룸서비스도 하는데 벨 보이는 팁 같은 부수입이 생기는 괜찮은 자리였다.
그때그때 호텔의 사정에 따라 근무처가 자주 바뀌었는데 커피숖에서 원두커피 내리는 일, 각종 음료 등을 다루는 일을 배워 훗날 좋은 경험이 되었다.
조금 경력이 쌓이고 일머리를 알게 되자, 지배인은 7층 라운지 근무를 지시했다.
스카이라운지는 스테이크 같은 식사와 칵테일 바가 있어 주류, 음료 등을 제공한다. 호텔일은 2교대라서 격일로 근무를 하였다. 그런데 술도 마시지 못하는 내가 칵테일 바에서 칵테일을 만들다니 좀 난센스였다. 내가 만든 칵테일의 맛을 나도 모르는데 손님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난감하기는 했다. 이른바 바텐더 역할을 하는 거였지만 칵테일 별로 제조 레시피가 있어 선배들의 가르침을 잘 배워서 실전에 나서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 인기 있는 칵테일이 주로 진토닉, 마티니, 맨하탄, 스크루 드라이버, 핑크 레이디 등이었다. 칵테일은 진, 보드카, 위스키 등을 베이스로 해서 탄산수, 주스, 과일시럽 등을 가미해서 만든다.
제법 칵테일 만드는 일이 손에 익어갈 무렵 어느 날이었다. 식사 주문을 처리하고서 여유가 생긴 식당부 주방장님이 여느 날처럼 칵테일 바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며 내게 가만히 속삭였다. “미스터 차, 내가 지난주부터 관찰한 건데 저기 저 테이블에 앉은 여자 손님 있지? 저 아가씨가 계속 자넬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요즘 자주 와서 저 자리에 앉아 자넬 쳐다보는 것 같던데.” “아, 저기 저 분요? 안 그래도 핑크레이디만 늘 시키던데요?” 그러고 보니 단골손님처럼 눈에 익은 아가씨가 늘 혼자 와서 항상 핑크레이디를 한 잔 주문 한다. 덕분에 핑크레이디 만드는 실력이 많이 는 것 같았다. 주방장님의 속삭이는 멘트에 난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순간 몸 둘 바를 몰라 어색해졌다. 일부러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태연한 척 행동하려니 그것조차 어색해진다. 아이 참, 주방장님이 왜 이러실까? 이십 대 풋내기 시절의 당황했던 내 모습이 지금도 미소를 머금게 한다.
핑크레이디는 드라이진에 그레나딘 시럽, 계란흰자, 라임주스 등을 넣고 셰이커로 서너 차례 흔들어 섞는다. 그레나딘 시럽이 빨간 석류 즙인데 이렇게 혼합하면 흰자거품과 함께 예쁜 핑크색으로 변신하여 여성들이 선호하는 칵테일이 된다.
손님 앞에서 칵테일을 만들 때 셰이커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머리 위까지 손을 치켜들며 쉐킹쉐킹하는 액션이 중요하다. 바텐더가 분위기를 살리는 일종의 퍼포먼스랄까. 만드는 과정이 정성스럽고 멋있게 보여야 칵테일 맛도 나지 않겠는가.
어때요? 오늘 핑크 레이디 한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