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우리 가족 휴가는 7월 16부터 7월 19일까지 3박 4일간 일본 규슈를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기간 동안 한국은 최악의 폭우로 온 나라가 물난리를 겪었다.
특히나 내가 사는 경남 산청지역에 사흘 동안 누적 강수량이 8백 밀리리터가 넘는 초유의 기록적인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많은 인명피해와 주택이 매몰되고 농경지가 초토화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우리 가족이 머물렀던 규슈 나가사키와 후쿠오카에서 국내의 물난리 소식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 마음은 가시방석이었다. 마치 비를 피해 휴가를 온 것처럼 규슈 지역은 웬걸 무더운 여름 날씨 그 자체였다.
김해공항에서 1시간 만에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마치 제주도 가는 시간에 외국으로 온 것이다. 우리 가족은 후쿠오카 공항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고는 곧바로 공항에서 출발하는 나가사키행 버스를 탔다.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간 크게도 짧은 일본어 실력으로 번역 앱에 의존하며 도전해 보기로 한 것이다. 두 시간 반을 달려 버스는 나가사키 시내 종점에 도착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런 건지 버스는 나가사키까지 논스톱으로 가는 고속이 아니었고 중간중간 여러 지역에 들러 승객을 내려주고 태우는 완행버스였다. 그래서 두 시간 반이나 걸린 것이지만 그 대신에 규슈 지방 소도시 마을을 살펴보며 여행하는 재미가 더 좋았다.
우리 딸이 사전에 꼼꼼하게 여행 스케줄을 짜고 예약까지 해 놓은 덕분에 무사히 숙소인 칸데오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버스 종점에서 내려 맞은 편 나가사키 역에 위치한 여행자 안내소를 찾느라 무거운 캐리어를 끌며 잠시 헤맸지만 그것도 자유여행의 재미였다.
나가사키 역에서 호텔까지 가기 위해 우리는 나가사키의 명물 노면전차를 처음으로 탔다. 트램이라 부르기도 하는 전차는 시내버스와 함께 나가사키의 주요 대중교통수단이다. 요금도 1회 승차요금으로 전 구간을 탈 수 있어 저렴한 편으로 시내버스 요금 정도였다. 나가사키 시내에 4개 노선이 있어 목적지별로 탈 수 있는데 특히 외국인 여행자들에게만 판매되는 일일승차권이 있어 관광객들이 아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우리도 이틀간 머무르면서 일일승차권을 매일 구입하여 시내 관광하는데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역시 일본은 조용한 나라였다. 버스 안에서도 노면전차 안에서도 케이블카 안에서도 식당에서도 모두들 묵언수행 중이었다. 하물며 이방인인 우리야 어찌 조신하게 다니지 않으랴!
나가사키는 일본이 서양근대문물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곳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도시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 스케줄을 짜면서 그러한 흔적들을 찾아보는 재미를 고려하였다. 이를테면 데지마, 글로버 가든, 오우라 천주당, 카스테라, 나가사키 짬뽕 등등...
그다음으로 나가사키에서 역사적 의미를 찾아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나가사키는 히로시마와 함께 원폭도시로 유명하다. 또 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 한국인들이 징용으로 끌려가 혹사당한 군함도(하시마)가 있는 도시이다.
나가사키 여행 첫날, 오우라 천주당과 글로버 가든을 구경하고 내려오는 길에 나가사키 짬뽕의 원조인 중식당 ‘시카이로’를 방문했다. 웅장한 5층짜리 중국풍의 건물이었는데 1899년에 창업하여 4대째 운영 중이라 한다. 이 집의 시그니처인 짬뽕과 사라우동을 맛보았는데 진한 돼지 뼈 육수 국물이 일품이었다. 과연 나가사키에 와서 이 짬뽕을 맛보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후회하리라. 정말 맛있었다.
나가사키 여행 둘째 날, 나가사키 원폭 박물관(자료관)을 방문하였다. 그동안 막연하게 원폭피해도시 정도로 알던 나가사키의 원폭피해 자료를 세밀하게 수집, 전시하고 있었는데 1955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1시간 넘게 박물관 전시자료를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관심 있게 살펴보았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태평양 티니안 기지에서 출발한 미 공군 B-29에 실린 원자폭탄 ‘팻맨’이 당초 고쿠라 市에 투하하기로 예정되었으나 짙은 안개로 실패하고 두 번째 예정지였던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나가사키 시내 상공에서 폭발한 이 원폭으로 7만 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박물관에는 이 참상을 보여주는 각종 자료들이 리얼하게 전시되었다.
원폭투하 시각을 가리키며 멈춘 찌그러진 자명종, 불에 타 버린 옷, 열에 녹아버린 유리병, 잿더미로 변해버린 건물들... 원폭박물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평화공원도 방문했는데 이곳이 바로 원폭이 떨어진 지점 즉 그라운드 제로라는 곳이다. 공원 한편에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크게 서 있는데 그 옆에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도 있었다. 나가사키 원폭으로 한국인 약 2만 명이 피해를 입었고 그중 1만 명이 사망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았던 나가사키의 모든 건물과 자연은 80년 전 원폭피해 이후에 조성된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원폭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오면서 일본인들이 원폭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마음이 착잡했다. 물론 그들은 히로시마와 더불어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을 맞고 가공할만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 임에는 틀림없다. 불특정다수의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된 사실에 대해 인간적으로 동정하지 않을수 없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목소리가 ‘우리는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평화를 외치고 있었다. 나는 한국인이라는 객관적 입장에서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들은 왜 그런 엄청난 재앙을 당하게 되었던가? 당신들이 진주만을 공습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미국 국민들과 아시아의 수많은 국민들을 학살하지 않았는가? 이에 대한 반성하는 자료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왜 매 맞을 짓을 했는가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선 침묵하고 오로지 피해자 코스프레만 하며 읍소하고 있는 것에 대해 실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원폭투하 하던 그 시각에도 나가사키 시내의 미쓰비시 중공업을 비롯한 여러 공장에선 여전히 전쟁 살상무기와 군수품을 만들고 있었다. 오키나와가 함락되며 패색이 짙어진 전황에서도 일본 군부는 원폭을 맞기 직전까지 본토 일사항전을 외치며 살상무기를 계속 만들고 있었다.
나가사키의 원폭 희생자들 가운데 많은 숫자가 여기에 포함된다.
정말 일본인 그들은 자신들만의 축소지향적인 사고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또 아이러니한 것은 원폭을 투하한 당사자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한다는 뜻인가?
나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이 과거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해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삼국 시대 때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시작되어 고려시대에도 삼남의 피해가 극심했고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켜 우리 땅을 초토화시키고 수많은 백성들을 학살하고 포로로 데려갔다. 임진왜란 이후 정유재란 때에만 10만 명의 우리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게 일본인들은 잔학했다. 조선말부터 식민지로 삼아 40여 년 동안 우리 강토와 국민들을 얼마나 유린했던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35만 명을 학살 강간한 일본이다. 또 만주사변을 일으켜 731, 516, 1644부대가 자행한 인간생체실험에 희생된 수많은 중국인과 한국인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DNA는 이토록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한 면모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똑같이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 바로 ‘국가적 양심’이다.
독일은 철저한 반성과 배상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일본은 침묵과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들의 후세들에게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교과서에서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러니 지금 일본 현세대들은 역사에 대해 무지하다. 우리 조상들이 그런 나쁜 짓을 했다고?
일본은 여러 시대를 걸쳐 이웃 나라를 괴롭혀 온 전범 국가이다. 제노사이드 범죄를 수없이 저지른 불량 국가이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조국을 위해 싸운 애국자로 추앙하기까지 한다. 일본정부각료들이 해마다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하는 것을 보라.
왜 일본은 지금도 그들의 국경과 맞닿은 북방 4개 도서, 센카쿠 열도, 독도에 대해 러시아, 중국, 대만, 한국과 분쟁을 하고 있는가? 오키나와도 애당초 그들의 영토가 아니었다. 강제 합병한 것이다. 그들은 영토 확장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야욕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던가.
나가사키 관광을 하면서 군함도(하시마 섬)를 소개하는 관광 상품도 봤지만, 우리 가족은 코웃음을 쳤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고 선전하고 있었지만 한국인 강제동원 역사에 대해선 전혀 언급이 없었다. 군함도 지하갱도에서 죽은 우리 한국인들이 134명이다. 사도광산과 더불어 자신들에게 불리한 과거역사는 빼고 역사를 미화시키는 일본다운 처사이다. 일본 가부키 배우의 잔뜩 분칠 한 얼굴이 생각난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겉으로 두꺼운 분칠을 한 채, 속으로는 자신들의 과오를 감추려고 무진 애를 쓴다. 감춘다고 감추어지는가?
그래서 내린 나의 결론은 일본은 원자폭탄을 맞을 자격이 충분한 나라였다는 것이다. 이런 돼먹지 못한 나라에게 강력한 철퇴를 내릴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을 괴롭히던 동네 양아치를 단번에 굴복시킨 무림지존이 나타난 것이요, 2차 세계대전을 종전시키기 위한 회심의 일격이었던 것이다.
마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안중근 의사의 권총처럼.
나는 오펜하이머가 그렇게 괴로워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원자폭탄은 동전의 양면처럼 선과 악의 두 가지 역할을 한다고 본다. 원폭이 개발되어 실전에 사용되지 않았더라면 더 오랫동안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용단을 잘 내렸다고 본다. 슬픈 일이지만 그나마 이 정도로 전쟁을 멈출 수 있게 한 순기능이 발휘된 역사로 기억하고 싶다.
숙소로 묵었던 나가사키 칸데오 호텔에서 가까운 곳에 데지마가 있다. 에도시대인 1636년에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네덜란드인들을 거주시킨 부채꼴의 조그만 섬이다. 다리로 연결하여 본토에 상륙을 금지하고 필요한 것만 허용하며 서양과 접촉하던 유일한 창구역할을 했다. 1859년 개항할 때까지 2백 년 넘게 지속되었던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을 엿볼 수 있다.
조선말기 흥선대원군 시대처럼 요지부동의 척화 쇄국정책을 쓰지 않고 일종의 숨구멍을 만들어 놓았던 일본인들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실사구시인 셈이다. 데지마를 통해 에도막부는 일찍이 화란어 통역관을 양성했고 훗날 2백여 년 뒤 미국의 흑선을 이끌고 와 일본을 강제개항 시킨 페리 제독과 가나가와 조약(1854년)을 위한 협상을 할 때 미국 측에 네덜란드어를 아는 군인이 있어 언어소통이 원활했다고 한다. 일본에 네덜란드어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미국이 더 놀랐다는 것이다. 근대문물을 우리보다 훨씬 앞서 받아들여 메이지 시대를 연 일본의 저력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때 우리 조선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 채, 위정자들이 깜깜이로 살고 있었으니 만시지탄일 뿐이다.
아무튼 이번 나가사키 여행은 재미보다는 역사적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진지한 시간들로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