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이 곡은 1991년 양희은의 앨범에 수록된 명곡으로 이범우 작곡 양희은이 작사, 노래하였으며 그동안 많은 가수들이 자신의 스타일로 재해석하여 불렀었다.
나는 그중에 한영애가 부른 곡이 가장 맘에 든다. 그의 노래를 듣노라면 가슴이 아려오며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하지만 사실, 난 이 노래를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이 노래의 제목과 가사가 이 글을 쓰는 내 심정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기에 글의 제목으로 삼고 싶었다.
지난 2024년 10월 초 어느 날 저녁 무렵 퇴근한 딸이 주차한 뒤 마당에 내렸는데 뭔가 세미한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다. 유난히 귀가 밝은 딸은 울음소리를 찾아 살펴보다가 텃밭 구석에서 조그만 고양이 새끼를 발견하였다. 잿빛과 하얀 무늬가 섞인 털 색깔에 이제 갓 눈을 뜬 요구르트 병 크기 정도 되는 아주 작은 아기였다. 걷지도 못하는 이 아기 고양이가 왜 여기서 울고 있는 거지? 고양이 어미는 어디 있는 걸까?
우리 집은 여태까지 고양이라곤 키운 적이 없는데. 하여튼 중요한 것은 이 작은 아기 고양이가 홀로 풀밭에서 제 어미와 떨어진 채 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곧 밤이 깊어질 텐데 이 일을 어쩐담? 마음 약한 딸은 아기 고양이를 손바닥에 감싸고서 집으로 들어왔다.
우리 가족은 개를 좋아해서 지금도 열 살 된 골든리트리버와 다섯 살 된 믹스 삽살개를 키우고 있지만 고양이는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평소 동물을 사랑하고 마음이 약한(?) 우리 가족은 차마 이 어린 고양이를 어두운 바깥에 내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딸은 급한 김에 조그만 종이상자에 헌 수건을 깔고 고양이를 누이고 손가락에 우유를 묻혀 고양이 입에 넣어 주었다. 배가 고팠는지 잘 받아먹었다. 밤새 검색해서 아기고양이 젖병이랑 분유를 주문하였고 이틀 뒤에는 젖병으로 아침저녁으로 아기 키우듯 분유를 먹여가며 아기 고양이를 키웠다. 아기 고양이는 마치 나일강가에서 이집트 공주에게 발견된 갈대상자 속의 어린 모세처럼 종이상자에 담겨 우리에게 온 아기 같았다. 우리 가족은 얼떨결에 키우게 된 이 아기 고양이를 ‘야옹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우리 가족에게 아무리 귀여운 애완동물이라도 실내에서 기르는 것은 금기사항이다.
그래서 비 가림 지붕아래 튼튼한 나무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로부터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야옹이는 몰라보게 쑥쑥 자랐다. 겨우 걸음마를 하던 것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고 마침내 잽싸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고양이 본래의 모습과 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끼 식사를 고양이 사료에 애완용 연어를 섞어서 나름 고급지게 먹였다. 그래서인지 몸집이 두 달이 지나면서 본래 발견될 당시보다 적어도 열 배 이상 커졌다.
올 겨울 강추위에 안쓰러워 핫 팩을 사다가 매일 집 속에 넣어 주었다. 야옹이는 매일 아침 8시, 저녁 5시가 되면 어김없이 현관문 앞에 와서 밥을 기다렸다. 하루 종일 집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놀다가도 밥때가 되면 정말 정확하게 현관문 앞에서 야옹 거리며 대기한다.
거기에 우리들의 마음을 홀리는 것은 이 녀석이 장난꾸러기라는 사실이다. 우리 가족이 마당에 나오면 장난을 걸어온다. 앞발을 가지고 툭툭 건들기도 하고 드러누워 재롱을 떨기도 한다. 특히 앞발을 잽싸게 놀리는 스킬이 보통이 아니다.
고양이를 키우는 이들은 알겠지만 앞발에 물이라도 묻으면 탈탈 털어내며 깔끔을 떠는 모습이란! 어휴, 뭐 저런 게 있지? 귀여워 죽을 지경이다.
야옹이가 자라는 과정과 재롱부리는 모습은 매일 우리 가족 단톡방의 단골메뉴가 되었다. 우리 눈에는 야옹이가 여타 다른 고양이보다 인물이 출중하다고 느꼈다. 얼굴이 정말 예뻤고 영리한 데다 재롱까지 피우니 평소 고양이를 싫어하던 아내의 마음마저 훔쳤다. 저녁 무렵 우리 가족이 퇴근해 오면 현관 앞에서 대기 자세로 기다리고 있다. 제 딴에는 반가운 의사표시를 하는 것 같았다.
이제 열흘쯤 되었다.
우리 야옹이가 열흘 전 밤 11시 반쯤 우리 집 CC TV에 모습이 보인 이후로 사라졌다. 거의 백일만이다. 아침에 밥 먹으러 나타나질 않았다. 나중에라도 오겠지, 대수롭잖게 생각했다. 저녁에 다들 퇴근한 후에도 야옹이는 보이질 않았다. 이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주변을 아무리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녀도 야옹이는 나타나질 않았다. 강아지처럼 가두거나 묶어놓고 키우는 동물이 아니다 보니 어딜 돌아다니다 오겠지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야옹이 먹으라고 놓아둔 사료 그릇은 근처 길냥이가 와서 냉큼 먹어버렸고 우리 야옹이는 끝내 돌아오질 않았다. 지금도 아침에 현관문을 열면 야옹이가 밥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고 저녁에 퇴근해 오면 현관문 근처에 야옹이가 뛰어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집 주변을 둘러보는 버릇이 생겼다. 저기 구석에서 당장이라도 야옹이가 튀어나올 것 같은 착시현상도 일어난다.
우리 가족이 백여 일 동안 애정을 쏟아부으며 사랑하게 해 놓고선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아, 그 허탈함이란! 배신감이랄까. 우리 가족은 야옹이에게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속히 집으로 돌아오라는 옛날식 광고라도 해볼까 하는 농담도 했다. 우리는 사랑했던 야옹이에게 차인 기분이 들었다. 실컷 애지중지 키워놓았더니.
그래, 함부로 마음을 주는 게 아니야. 그런데 고작 백일동안에도 이런 감정이 생기다니, 놀랍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노래가 가슴이 시리도록 사무친다.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