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람이 불어오는 지금, 추위가 온몸으로 느껴지네요. 그러나 케이팝이 전하는 열기는 여전히 뜨끈한 것 같습니다. 케이팝은 1990년대 후반 이후, 중국 베이징에서 H.O.T.를 포함하는 1세대 아이돌 그룹이 큰 반향을 일으킨 이래 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죠. 그러다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를 강타한 이후 본격적으로 세계 곳곳으로 퍼져 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아이브부터 에스파까지 다양한 4세대 케이팝 그룹이 앞다투어 신곡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는 댄스 챌린지, 커버댄스, 재편곡된 곡 같은 흥미로운 2차 생산물이 계속 올라오고 있네요. 갑자기 추워진 요즘, 케이팝으로 몸을 데워 보는 건 어떨까요.
주변의 많은 곳에서 케이팝이 전달되고, 수용되고 있습니다. 가장 온도가 높은 곳은 단연 ‘라이브 콘서트 현장’. 이곳에서는 아이돌 그룹과 팬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만납니다. 서로 거대한 물결을 이룬 채 노래 부르고 소리 지르지요. 가수나 팬 모두 묵직한 EDM 의 베이스음부터 높이 솟아오르는 고함소리까지 다채로운 소리 풍경을 체감하고요. 그리고 케이팝에 깃든 문화적 코드를 은밀하게 나누거나요. 이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케이팝이 아이돌 그룹과 팬덤의 상호작용 속에서 확산되는지를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실황 공연장은 케이팝 문화 연구의 주제의 측면에서도 뜨거운 곳.
케이팝 콘서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어느 그룹이냐면, 여러분이 좋아하실 ‘블랙핑크’. 알려진 대로, 블랙핑크는 힙합 기반의 음악을 지향하는 세련된 걸그룹입니다. 지수, 제니, 로제, 리사로 구성된 4인조고요. 2016년에 데뷔한 이래 빠른 속도로 세계적인 걸그룹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지난 9월 고척스카이돔에서는 블랙핑크 월드투어 ‘본 핑크’(Born Pink)가 열렸습니다. 이 이벤트가 가지는 의미는 많습니다. 이 그룹이 11개월 동안 세계 34개 도시에서 개최한 월드투어의 대미를 장식하는 공연. 당분간 보기 힘들 수도 있는 4인의 ‘완전체’ 콘서트. 2023년 가을 초입부터 연이어 국내에서 열리고 있는 케이팝 콘서트의 출발점이면서 다국적 팬들이 대거 참여하는 올해의 마지막 국제적 행사. 콘서트가 개최된다고 발표되었을 때, 대중음악 연구를 하는 저의 촉각이 곤두세워졌습니다. (지금이야, 지금!)
선예매와 일반 예매의 절망적인 결과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접속해 마지막 콘서트 이틀 전 새벽 극적으로 ‘취켓팅’에 성공한 저는 공연을 보러 고척스카이돔으로 갔습니다. 구일역에 내리니 주위는 벌써 콘서트 열기로 후끈했습니다. 검정과 분홍이 돋보이는 패션으로 멋지게 꾸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행렬을 지었어요. 아, 일기예보와 달리 하늘이 더없이 맑았습니다. 비탈진 콘서트장 진입로에 들어서니 양쪽에 멤버들의 모습이 담긴 현수막이 줄지어 펄럭이고 있었지요. 그 길 끝에는 고척돔이 거대한 신전처럼 웅장하게 서 있었던가요. 곳곳에서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 태국어가 들려왔습니다. 블링크는 공연장 바깥에서 다양한 포즈로 인증샷을 찍으며 현장의 분위기를 만끽하고 또 만끽했습니다.
시간이 되어 콘서트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2시간 동안, 어두워진 돔에서 현란한 분홍빛 조명을 맞으며 수많은 팬들과 같이 공연을 즐겼지요. 블랙핑크는 총 22곡을 불렀습니다. 전주에서 거문고 소리가 인상적인 ‘핑크 베놈’(Pink Venom),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 3악장 ‘라 캄파넬라’를 샘플링한 ‘셧 다운’(Shut Down), 콘서트의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처럼’을 아우르는 블랙핑크의 히트곡과 제니의 ‘솔로’, 로제의 ‘온 더 그라운드’, 지수의 ‘꽃’, 리사의 ‘머니’와 같은 솔로곡까지. 그 무대에는 7년간 멤버들이 함께 또 따로 엮어 간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 기나긴 목소리에 저는 다른 팬들과 더불어 크게 화답했지요, 아마.
공연장 밖을 나오니 이미 인파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수많은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구일역으로 향했고, 저는 그 흐름을 소리 없이 따라가다가 다른 이들처럼 어느 시점에 빠져나왔습니다. 공연의 감동을 가득 안은 채.
콘서트의 전후를 돌아보니 케이팝이 주변으로 퍼지는 과정이 보였습니다. 서로 연결된 채 소리적으로 독특하게 드러나는 세 가지 단계를 거쳐서요. 하나는 ‘우상화’입니다. 이는 스타가 우상이 되고, 팬덤은 그를 우상으로 삼는 단계를 말합니다. 이 과정은 블랙핑크 콘서트 현장에서는 그룹의 ‘시그니처 사운드’와 팬들의 함성소리로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멤버들은 히트곡을 부를 때마다 도입부에 삽입되어 있는 시그니처 사운드 ‘Blackpink in your area’를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그룹의 스타적 존재감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면서. 팬들은 어땠냐고요? 노래가 시작하고, 끝날 때마다 분홍빛을 발사하는 응원 봉을 흔들며 ‘와아’ 함성을 터트렸지요.
다른 하나는 ‘평등화’입니다. 이는 가수와 팬들이 대등한 관계를 맺어가는 단계로, 가수와 팬들이 하나 된 채 콘서트를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블랙핑크 콘서트에서는 이 흐름이 다른 케이팝 콘서트처럼 ‘떼창’의 소리를 통해 흥미롭게 표출되었습니다. 예컨대, 블랙핑크와 팬들이 ‘불장난’의 후렴구에서는 가사 ‘불장난’을 함께 외쳤고, ‘Forever Young’의 후렴구에서는 가사 ‘Forever Young’을 메기고 받았지요. 그러한 과정을 통해 두 주체가 하나의 네트워크 속에서 함께 연행(performance)했습니다. 그룹이 노래를 단순히 전달하거나, 팬덤이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면서.
또 다른 하나는 ‘내면화’입니다. 이는 문화에 스며들어 있는 가치관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말합니다. 해당 가치관에 기반해 마음속으로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과정이라고 할까요. 가수든 팬이든 케이팝을 향유한다는 건, 음악, 춤 뮤직비디오를 즐긴다는 것을 뜻하면서 동시에 케이팝에 내재된 다양한 생각들을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블랙핑크 콘서트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콘서트가 끝나고 블랙핑크와 블링크는 인파에서 이탈하면서 속으로 많은 말을 했겠지요. 그중 한 가지는 ‘주류 속의 비주류’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콘서트에서 블랙핑크는 언제나처럼 동세대 걸그룹과 비슷하게 여성미를 발휘하는 동시에 그들과는 다르게 ‘걸 크러시’적 분위기를 뿜어냈습니다. 그러한 이중적 콘셉트 아래 이들은 댄스팝 풍의 노래와 힙합 기반의 곡을 모두 들려줬지요. 그 음악에 스며든 생각은 때로는 유행을 따르면서 때로는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그러한 생각이 와 닿았기에 사람들이 콘서트장에서 블랙핑크에 변함없는 지지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블랙핑크와 팬들은 공연 이후 음악에 담긴 ‘주류 속의 비주류’라는 메시지를 속으로 확인하고, 또 외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콘서트가 끝나고 며칠 뒤 연구소에서 퇴근을 하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봤습니다. 저녁노을이 검은 듯 붉은 듯 절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과 발맞춰 걸으면서 조금은 삐딱하게 걸어가려는 콘서트 현장 사람들의 모습처럼.
(1) 취소한 표 티켓팅↩
(2) BLINK. 블랙핑크의 팬덤 이름.↩
54호_VIEW 2023.11.30.
글 ∙ 권현석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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