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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만이라도 행복할 수 있을까

[응급실이야기 150908] 환자 보호자가 된 의사 아빠들 #2

여기, 의료인이면서 보호자로서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던 또 다른 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소 저와 알고 지내는 한 외과 선생님의 이야기인데요, 인터뷰를 통해 당시 힘들었던 상황을 담담히 꺼내 놓으셨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이분의 입장이 되어 대신 이야기를 전해 드리려 합니다.




1월의 어느 한겨울 날, 기다리던 열 달을 모두 채우고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저는 외과 전공의로 4년차 막바지 수련을 받고 있었을 때였지요. 축복 속에 태어난 아이가 생후 2개월이 되던 초봄 어느 날, 특별한 증상 없이 갑자기 열이 나기 시작했고 열이 조절되지 않더니 다음 날 경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수련 중이던 병원 응급실로 실려 온 아이는 혈액검사와 뇌척수액 검사를 통해 세균성 뇌수막염 및 뇌염을 진단받았고 갖은 노력에도 경련이 멈추지 않아 인공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로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치료 과정 중 시행한 머리 CT, MRI 검사 결과는 한쪽 뇌가 다 녹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참담했고, 생사를 넘나드는 긴 치료과정을 거쳐 2개월 만에 겨우 인공호흡기를 뗄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아이는 목도 가누지 못하는 상태 그대로 강직성 사지마비라는 진단을 받고 길고 긴 재활치료에 들어갔습니다. 경련약을 복용해도 지속되는 경련에 부모로서 몸고생 마음고생 정말 많았지요. 그때까지 무신론자였던 전 누군지도 모를 신께 기도했습니다. 제발 저 아이가 입으로 밥 먹고살게만 해 달라고, 다른 건 바라지 않겠다고... 그래서 그런지 딱 거기까지만 해 주시더군요. 그렇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지마비 환아 보호자로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길고 긴 사지마비 환아 보호자로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아픈 아이를 돌보기 시작하니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전문의 시험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아내의 의견에 따라 아이는 아내에게 맡겨 놓은 채 그렇게 손에 잡히지 않는 책을 붙잡았습니다. 다행히 당해 전문의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고 다음해에는 군 생활 대신 지방 보건소에서 공중보건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짧은 생각으론 이제 긴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아픈 아이를 위해 돈을 많이 벌어 놔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아내에게만 맡겨 놓고 매일같이 당직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밤 근무를 마치고 집에 오는 날은 물리치료, 재활치료를 위해 대학병원으로 아이를 이송해 주는 역할을 하고, 그 외에 밤은 모두 병원에서 지내는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4시간 엄마 등에 업혀 나아질 기미 없이 경련을 반복하는 아이의 병수발에 지쳐 가던 아내가 제게 얘기하더군요. 며칠 전부터 복도를 지나는데 그런 상상을 하게 된다고요.


나와 아이가 여기서 떨어지면 당신만이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지금 저희 가족에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긴긴 투병 생활 동안 지치지 않는 것이었다는 걸... 제 어리석은 판단에 고통 받다 극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던 아내에게 정말 미안했습니다.




도움 받을 가족 없이 지방에서 아이를 돌보느라 지쳐 가던 그때, 한 줄기 희망이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첫 번째 기적인지도 모릅니다. 물리치료를 받던 중 지쳐 있는 아이 엄마의 모습을 본 물리치료사가 새로 개원을 준비 중인 어린이집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어린이집은 근처의 개척교회에서 장애아동 통합 어린이집으로 운영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습니다. 저희에게는 정말 하늘이 준 선물과도 같은 상황이었죠. 당장 이 아이가 너무 버거워진 상황이었으니까요.


드디어 아이가 2살이던 가을 날, 어린이집 차량이 왔고 첫 등원을 시켰습니다. 이제까지 모든 것에 도움이 필요하고 목조차 가누지 못하는 아이와 한시도 떨어질 수 없었던, 그래서 햇빛 보는 것조차 사치였던 아내에게 처음으로 고요한 자유의 시간이 생긴 것입니다.


아이를 보내 놓고 아내와 전 한동안 아무 대화도 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려니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서 방임이나 학대를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하면서 영 기분이 좋지 않더군요. 그러자 아내가 일어나 설거지와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전, 조용히 아내를 제지했습니다.


이거 하려고 우리 아이, 어린이집 보낸 거 아니잖아...



아이를 낳은 이후 처음으로 둘만의 외출을 하기로 했습니다. 아파트 뒷산에 올라가기로 한 거죠. 기린봉, 지금도 기억나네요. 너무 오랜만에 야외활동을 나오니 지금이면 10분 만에 올라갈 뒷산 봉우리를 1시간에 걸쳐 헉헉대며 올라갔습니다. 아내가 몸도 마음도 너무나 약해져 있었던 거죠. 가슴 아팠습니다.


그 뒤로 아이가 어린이집으로 가면 매일같이 뒷산을 올랐습니다. 산을 헉헉대며 오르는 그 시간만은 아이를 지켜보는 고통도, 아이를 건강하게 키워 내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몸에 힘이 나고 마음도 편해져 부부간에 대화도 늘고, 산에 오르신 분들과 정보 교환도 하다 보니 다른 등산코스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남도지역의 산 곳곳을 다니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정신건강도 좋아졌고 무릎과 허리도 좋아져서 아이를 업고 있는 것이 힘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아파트 뒷산에 올랐었지요 지금은 아이와 함께 캠핑을 갑니다



그렇게 3년간의 공중보건의 생활을 마치고 지방에서 올라온 뒤, 저희는 또 한 번의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아이를 보살펴 주었던 곳 같은 장애아동 어린이집을 수도권에서 찾아보니 대기자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당장은 도움 받을 상황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번 둘러나 보자 하는 생각으로 저는 혼자 아이를 업고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한 장애인 복지관을 방문했습니다.


그 모습이 관계자 분들이 보기에는 아빠가 홀로 중증 장애 아동을 키우며 고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나 봅니다. 한 수녀님이 조용히 저를 방으로 부르더니, 상황이 되지 않지만 사정이 딱하니 자리를 마련해 주겠노라 약속을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아빠가 의사이고 아이 엄마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들 놀라워했지만, 근무하는 병원이 복지관 근처여서 복지관 아동들이 여러 도움을 받게 되자 관계자 분들도 제게 감사해하셨습니다.


그렇게 5년 정도 살면 많이 사는 거라던 처음 발병 당시의 평가를 뒤로 하고 아이는 무럭무럭 잘 커 주었습니다. 그때까지 이 아이에게 쏟는 정성이 줄어들까 걱정되어 미뤄왔었던 임신 계획을 용기 내어 진행해, 예쁜 동생도 얻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웃을 때 저는 행복합니다


장애 아동을 가진 부모에게 한 가지 아픈 시간이 왔습니다.


아이 또래 친구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시기가 되자, 일괄적으로 발송되는 초등학교 취학통지서가 날아온 것이었습니다. 의무교육이라지만 실제로는 학교에 갈 수 없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은 참 씁쓸한 것이지요. 게다가 일반 학교가 아닌 특수학교의 도움을 받으려 해도 사지를 전혀 쓰지 못하는 저희 아이는 받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뭉쳤습니다. 복지관에서 만난 일곱 가족이 교육청에 민원을 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중증 장애 아동이라 하더라도 초등학교 의무교육은 받을 수 있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냐는 내용이었습니다. 다행히 요청이 받아들여져 일반 초등학교에 특수학급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 나이까지 잘 커 주고 있습니다.




요즘 마음과 몸이 많이 건강해진 저희 가족은 함께 드라이브도 하고 캠핑도 가며 행복을 느끼고 추억을 쌓아 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아이가 나보다 먼저 눈을 감는 날이 오겠지만 그날도 잘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이 아이가 저희 부부에게 와 주어 너무도 고맙습니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올 여름엔 계획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가족이 제주도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는 것입니다. 아이와 함께, 가족과 함께 계속해서 기적을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계속해서 기적을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삽화 : http://blog.naver.com/gsleeyy 이윤영님 제공




지금까지 제가 그 선생님의 입장이 되어 많은 어려운 상황들을 하나씩 짚고 따라가 보았습니다. 하나하나 되짚어 보니 선생님의 가족과 함께 참 많은 기적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기적을 경험하고 나서야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내 아이가 남들보다 성적이 높아야, 좋은 학벌을 얻어야, 좋은 직장을 가져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있어 주어서, 아이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또한 어려운 이야기를 담담히 공개해 주신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제게 담담히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선생님의 표정을 보니 이분은 장애 아동을 키우는 고통에 대해 치유가 많이 되셨구나, 그래서 이렇게 힘들었던 과정을 다 얘기하실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자꾸 얘기하고 힘들었다고 표현하면서 자기 자신을 치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의 부인이 극한 생각을 혼자 하지 않고 용기 내어 표현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병원에서 환자 앞에 설 때엔 의사이지만 근무를 마치면 한 명의 생활인입니다. 그래서 때론 환자가 되었다가 어떤 때엔 보호자가 되기도 하지요. 진료를 볼 때에도 이런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환자와 의사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150908 최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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